부잣집 친구는 이미 2학년 때 컬러 TV를 보던 시절이다.
우리는 치지직거리는 금성 흑백 TV와 주파수 맞추려면 한참을 돌려대야 하는 도시바? 라디오가 있었다.
까만 밤, 도서실에서 하루에 지쳐 돌아오는 여고생.
라면 하나로 저녁을 때우고 밤까지 공부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나는, 고 2 때 50kg 대에서 40kg대로 진입했다. 그 모습을 보는 지금의 나는 마음이 짠하다.
늦은 밤 어두컴컴한 골목을 돌아 집으로 함께 걸었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아랫목 할머니 곁에 가만히 누웠다. 그리고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 TV나 라디오에서 정규방송이 끝날 때 애국가로 마무리를 했다. 아마 시작할 때도 애국가로부터 시작했을 것 같다. 나는 그리 알고 있다.
라디오의 애국가가 문제였다.
3학년 올라가서 새롭게 만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학교 근처에 살았다. 3학년이 되어서 상과반과 문과반으로 나뉘어 교육과정이 운영되었고 대학진학을 목표로 공부할 때 둘은 서로 격려하며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고 3의 늦은 봄 어느 날
둘이 하교하는 길에 친구가 내게 제안했다.
"ㅇㅇ야, 우리 함께 공부 좀 할래?"
"그래. 언제 어디서 하는 게 좋을까?"
"일찍 등교해서 학교에서 하자."
"응 좋아."
"그럼 네가 학교 오면서 우리 집 지날 때 나를 불러. "
나는 학교 가는 길에 친구를 부르기로 했다.
그날 밤도 집 근처 문화원에서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할머니 곁에 누웠다. 내일은 늦지 않게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에 라디오를 켜두었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
진짜 잠이 들었나?
얼마를 잤을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내 귀에 애국가가 들렸다. 발딱 일어났다. 그러고는 비몽사몽 간, 정신 차리게 세수하고 대충 챙겨서 나갔다.
'벌써 새벽인 거야?'
보통 정규 방송은 4시나 5시에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봄이라 기온은 적당했고 아주 이른 새벽에 일어나 본 적이 없어 유난히 깜깜하다 생각했지만, 새벽 4~5시에는 이렇구나 했다.
시계도 확인할 곳이 없고, 뛰쳐나와 걷는 길엔 너무나 진한 어둠과 적막함만이 있었다.
시골의 길은 읍내라도 넓어 봤자, 소형차 왕복 1차 도로다. 비포장의 넓은 도로를 지나 좁은 길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길은 폭 1m쯤도 되는 곳도 있다.
반은 잠결에 걷는데 사방팔방 왜 이리 깜깜한지... 나의 길이 안전한지 보아주는 양, 둥글고 밝은 큰 달만이 계속 따라왔다.
뭔가 굉장히 이상하고 고적했다. 그리고 골목 길가 집벽으로 생기는 그림자는 골목을 돌 때마다 방향도, 길이도 바뀌었다.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의 정체를 확인하려 하면 더 무서울 것 같아 앞만 보고 숨죽이고 걸었다. 무서움이 들어 노래도 흥얼거리며 잊으려 했다. 누군가 휙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밤중 조용한 곳을 걷는 일은 안 하고 싶었다. 진짜 오싹했다.
그러나 시각은 알 수 없고 나는 약속한 대로 친구를 깨워 학교에 가야만 했다.
평소 20분 정도면 가는 길이 2시간은 걸리는 듯 길었다. 뒤꼭지가 쭈뼛대는 공포를 견디고 드디어 친구네 집에 도착했다.
"ㅇㅇ야~~"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마자 친구도 부스스한 모습으로 대충 챙기고 나왔다. 친구와 학교로 향했다. 둘이 되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는 정문은 굳게 닫혀있으니, 허술히 늘 열려있는 뒷문으로 들어갔다. 교사로 들어가는 문이 닫혀 있었다.
이쪽저쪽 창문이 잠기지 않은 곳을 찾아 창문을 넘어 들어갔다. 도둑이 담을 넘듯 창틀을 넘어 들어갔어도 당당히 걸어 교실까지 가서는 불을 켰다. 당당했던 이유는 곧 등교할 시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여전히 어리바리한 상태로 공부를 하려 책을 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밖에서 학교 경비 아저씨 소리가 났다.
구시렁거리며 걸어오는 게 분명 혼잣말이다.
교실문을 열고는 아저씨의 눈이 커지며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잉~ 화나신겨~ '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너희들 뭐야? 집에 안 갔어?"
.......
"아니~~ 방금 내가 야간 순찰하고 자려는데 불이 켜졌지 뭐야. 너희들은 어디 있다가 온 거야?"
'방금 점검?'
"저희는 집에 갔다가 온 건데요~."
"지금 12시 넘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잘 시간인데......"
헐~ 그때서야 알았다. 우리, 아니 내가 뭘 착각했는지...
"저희 여기서 공부할게요. 가서 주무세요."
아저씨는 이상한 애들을 다 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셨지만 뒤돌아 내려가셨다.
어쩐지 이상하게 졸립더만......
아저씨가 내려가자마자 우리 둘은 얼굴 한 번 쳐다보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책상 위에 엎드렸다. ㅋㅋ
잠은 알아서 왔고 우린 환한 아침이 되어서야 깼다.
공부는 뭔 공부!
아침, 친구들이 등교하기 전에 화장실에서 대충 양치를 하고 세수를 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어쩜 그날 책상 위에 엎드려 잤는데도 추웠거나, 찌뿌둥도 하지 않았다. 진짜 잘 잤다.
친구와 나는 하룻밤 그 몇 시간의 착각 속에서 '이렇게 공부는 못할 것 같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무모한 결심이라고 생각했다.
작심 하루도 지키지 못한 공부에 대한 어설픈 열의는 그렇게 끝났다. ㅎㅎ
그런 열의가 있었기에 난 교대를 갔고, 그 친구는?오랜 후. 행정실장이 된 친구를 만났다.
꿈같은 몇 시간이었지만, 난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있잖아 말이지. 고 3 때 친구랑 공부한다고 새벽부터 등교했는데, 그때가 한밤중이었어. 그런 일도 있었지~라고.'
추억의 흔적을 찾아 열다섯 번째 문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