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후 50년 이상, 짙은 그리움과 절어든 삶의 비애로 온몸이 늘 무너져 내리는 듯했습니다. 몸이 그리 약하고 아팠던 이유가 심인성이었음을 알고 어느 정도 치유하고 나니 이런저런 사고로 뼈가 부러져도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고 근력도 붙어 건강을 느끼며 삽니다.
치유의 글을 쓰며 그리워 보내지 못했던 인연들을 하나 둘 보냈습니다. 마음의 슬픔은 사라졌어도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필름처럼 내 기억의 강을 흐르고 빛바랜 모습은 눈을 비벼 뜨게 하며 눈시울을 적십니다. 행복한 모습들이었다면 내내 눈물의 강을 이루지는 않았을 것이리라. 고단해 안쓰러운 모습들이 떠오르면, 짧은 삶의 여정에서 사랑을 충분히 나누지 못한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 나옵니다.
삶에 절어 목표와 희망을 잃은 표정들,
의지를 잃고 삶의 흐름에 표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 악다구니치고 다투며 수치를 모르고 멋모르게 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가슴 찡하게 감사하게 하는 사랑을 주신 분이 계시고 다시 재회하고픈 친구도 있습니다.
언제 질지 모르는 삶 속에서 한없이 살 것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일찍이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삶이듯 모습들은 이러나저러나 삶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 인연들을 보며 그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감정은 지금 다시 내 마음속에 살아납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인연들의 얼굴.
지금 생각하니 40 불혹의 나이가 되면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데, 사는데 지쳐 책임과는 멀어져 보이는 얼굴들입니다.
부모님이 그러하셨고, 조부모님이 그러하셨습니다.
풍랑의 세상과 삶이 무겁기에 하나의 작은 얼굴에 새겨지기에는 여전히 가벼움이 있습니다만, 40의 나이는 풍랑과 고요의 경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에게는 고요가 없고 평안이 없었습니다. 물론 지천명의 지혜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과거의 인연들을 떠올리면 드는 생각들입니다.
나는 기억 속에서 보았고 지금도 삶의 주변에서 늘 봅니다. 40의 경계를 넘은 그들의 얼굴을, 미혹에 빠져 미망의 늪에서 늘 허덕이다 책임지지 못한 얼굴들요.
보는 나는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지난한 삶의 모습이라면 그저 애처롭기만 하네요.
그들은 힘들지 않았을까요?
즐겁지 않을 것 같은 일에 기쁨을 느끼기도 했고요. 그들에게는 하루 해를 맞으며 보내는 일상이 전부였습니다.
단순하게 때론 요란스럽게 살다 간 과거의 인연들을 다시 흘려보냅니다. 그리운 얼굴들을 활자 속 파편으로 흩어 보내고자 합니다.
오늘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사는 날까지 절망 속에서도 한없이 희망을 찾는 존재입니다.
by 소망
그들 모두 그렇게 살다 갔기에 위로가 됩니다.
21화부터는 그리운 인연의 흔적으로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