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현재를 사신 배포 큰 할머니
껌딱지처럼 붙어살며 그리 좋아했던 친할머니.
할머니는 호탕하시고 유머도 있으셨다. 때론 밥상 앞에서 할머니의 말씀 한 마디에 빵 터져 웃었고, 할머니가 웃으실 때 나도 마냥 신났다.
세월이 지나 엄마가 되어보고 할머니가 되어갈 즈음이 되니 나도 검은 머리 짐승인가?... '할머니는 6세에 엄마를 잃은 손녀를 진짜 사랑하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3학년 아이에게 치매 할아버지를 맡겨놓고 학교도 결석시키며 서울로 가신 할머니는 돌아오셔서 한 번도 '애썼다. 고생했네.'등의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3학년 때도 옷은 외할머니께서 얻어주신 것을 입었다. 아마 외사촌 옷을 가져다 주신 듯했다. 단추가 두 개나 떨어지고 털이 듬성듬성 빠진 빨간 털외투와 무릎은 해지고 쑥 나온 춘추 바지를 입고 찍은 흑백 사진이 있다. 오빠의 6학년 졸업식에 찍은 사진인데 최근 오빠가 톡으로 보내주어서 가끔 보곤 한다.
3학년 때 찍은 사진이니 50년이나 지난 사진이지만, 단 한벌밖에 없었던 옷이라 기억에 선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는 언제나 감았을까... 아마 이도 키우지 않았을까 싶다.
오빠 졸업식인 그날엔 밤사이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발부터 전신이 다 나온 사진 속, 앞코에 눈이 덮인 신발이 눈에 뜨였다. 그 신발은 여름샌들이었다. 어쩌다 생긴 지 기억은 없는데 처음 신어본 샌들이라 그저 신나서 그것만 계속 신었던 기억이 난다. 여름과 가을을 지내고 겨울이 되니 발등에 프린트가 지워지고 비닐 껍질이 벗겨졌었다.
어른이 되어 보니 오빠는 6학년이라고 그래도 얇고 허름한 운동화를 신었고 옷은 후줄근하나 단추는 제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를 보니 털신에 덧버선에 두꺼운 긴치마를 입으셨다. 위에는 막내 따님이 사준 앙고라 털스웨터에 경단 모양으로 길게 엮인 긴 숄을 두르셨다.
'내가 할머니였다면...' 이쯤에서 말을 줄이려 한다.
푸념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 사진을 보기 전까지 할머니가 우리를 사랑했다 믿고 살았다.
그 사진이 남은 이유는 오빠가 할머니의 자랑이었기 때문이다. 오빠는 똑똑해서 큰 상과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세심하고 자상한 분은 아니었다. 나는 솔직히 식모이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고인이 되신 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분의 삶도 힘들었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살기에 바쁜 사람은 자신을 지키는 이기심에 살기 마련이다. 그저 한데서 자지 않고 밥 먹고 살았으니 다행이고 그도 거두어준 할머니께 감사할 일이다.
할머니의 커다란 장점이 배포가 크시다는 거다. 나는 할머니께 큰 덕을 보았다.
할머니는 세심한 자상함이 없었어도 나의 인생 갈림길에서 큰 업을 세워주신 분이다. 지금 생각하면 앞일을 염려하며 전전긍긍 사신 분이 아니다.
고 3이 되기 전, 상과와 문과를 지원한다.
학교에서 부모님과 상의해 오라는데, 고민이 되었다. 저녁 밥상 앞에서 조심스럽게 할머니께 말을 꺼냈다.
"할머니, 졸업 후 실업을 택하는 상과와 대학 진학하는 문과반을 정하라는데요...... 할머니, 저요~ 공부 좀 더 해보고 싶어요."
중학 재수 때부터 학교 소사나 공장에 여공으로 보내라는 소리를 하도 들은 터라 우리 형편에 어찌 가당키나 할까 생각하며 머뭇거리며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예상외로 듣자마자 "그럼 문과 가." 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그리 쉽게 허락하실 줄 몰랐다. 그래서 난 문과반을 선택했다. 할머니는 대학 학비 등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니 걱정 근심 없이 사신 것이다.
고 3 봄, 첫 모의고사가 있던 날이었다. 모의고사가 시작되었다. 이번 첫 모의고사는 전체 등수를 게시한다고 했다. 우등생이던 나는 자존심 구길까, 소심한 성격 탓에 긴장을 많이 했다.
둘째 시간, 수학이었다. 시작종이 울렸다. 시계음이 들린다...
보통 처음엔 쉬운 문제가 나온다. 그런데 1번을 푸는데 안 풀렸다. 마음속 시계음은 더욱 세차게 울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생각만이 가득해지고 있었다. 2번으로 넘어갔다. 문제를 읽어도 읽히지가 않는다. 3번으로 넘어갔다. 4번으로, 5번으로... 계속해서 넘어갔다. 마음속의 시계는 계속 흐르고... 문득 내 긴장 속에서 빠져나왔다. 벽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뭔가 공명 속에서 헤매는 동안 시간은 흘러 종착까지 10분을 남기고 있었다. '아차~' 슬펐다. 망했다는 생각보다 그 속에 빠져있었다는 것이 슬펐다. 순간 끝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은 그냥 찍는 거였다. 그것을 아는데, 도저히 찍을 수 없었다. 내 사전에 문제를 보지도 않고 찍어 본 적이 없었으니 그것도 습관이라고 깨지를 못했다. 지금은 다 가능한데 말이다.
소곤거리는 앞 번호 친구와의 대화... 그 당시 시험 줄은 한 줄로 책상을 떼어 정렬하고 번호대로 앉았다. 다행히 난 앞 번호 친구와 친한 친구ㅡ의협심에 얻은 그 친구ㅡ였다.
"ㅇㅇ야, 나 문제 하나도 못 풀었어."
"그냥 찍어~"
"도저히 못 찍겠어."
"빙신~"
"나 좀 도와줘."
"야, 답지에 적어. 불러줄게."
.......
그날은 내게 엄청 치욕의 날이었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날의 일을 할머니께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큰 가르침을 주셨다. 난 그때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사람이 간이 그리 작아서 어찌 사냐? 시험 한 번으로 인생 끝나는 것도 아닌데... 그깟 것 하고 잊어버려. 다음에 잘 함 돼지. "
그날 이후 난, 배포와 간 큰 사람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릇 깨면 다친 것보다 깬 그릇이 아까워 욕을 했어도 내 인생의 큰 갈림길에서 등불을 건네주셨다.
할머니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날 옷하나 안 사 입히셨어도 교직의 길을 걸어 내 먹고살 것을 챙기게 해 주신 할머니셨다.
사람마다 그릇의 모양이 다르고 크기도 다르니 쓰임도 다르다는 것이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매우 타당한 진리처럼 느껴진다.
할머니는 나름 현명하게 잘 사신 분이었다. 결국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신 분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하나님께 의지하셨다. 늘 초파일과 백중이면 절을 찾으셨던 할머니셨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기왕 믿으려면 큰 신을 믿어야지."
그 한 마디로 교회 목사님의 기도 속에서 안식하셨다.
할머니는 와상 상태에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지금 같으면 더 사실 수 있는 고관절 골절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나는 자주 친정집에 가서 매번 애도했다. 할머니를 사랑한 마음에 하도 울었더니, 정작 돌아가신 후에는 마음이 담담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흘리는 눈물은 바닷가 모래에 붓는 물과 같다고 한다. 필요치 않은 후회의 눈물이기 때문이라는데, 할머니를 자주 가서 뵙고 마음을 쓰며 준비를 해서일까... 후회가 없었다. 그냥 할머니의 유머로 웃었던 기억들만이 내 가슴에 남아있다.
ㅡㅡㅡㅡㅡㅡ
그리고 그 모의고사일의 깨알 같은 뒷이야기...
첫 모의고사 결과 난 몇십 등 추락했다.
복도에서는 웅성웅성~~ 꼭 내 얘기하는 듯... 많이 팔렸다. 그러나 할머니 덕에 다시는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처음에 망치고 나니 올라가는 일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나의 점수는???... 상상에 맡기지만, 그냥 아무 번호를 써서 정답이 되는 확률은 10%도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다음 화는 또 다른 할머니의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