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4> 인연의 흔적... 또 다른 할머니 2

할머니 죄송합니다!

by 소망

외할머니는 굉장히 부지런하신 분이셨다. 늘 담장 안과 바깥의 텃밭을 가꿔 채소를 기르셨다. 부지런하신 만큼 사시사철 자연이 주는 먹거리가 풍성했다. 농사를 전혀 짓지 않는 한길 가에 위치한 우리 집보다는 늘 아름답고 풍성했다.


내가 다니던 여고 근처에 할머니 댁이 있었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 자율 시간이 되면 할머니 댁 담장을 휘 둘러보았다. 봄에는 농익어 검붉어 가는 보리수를 따 먹었다. 키 작은 앵두나무에 다닥다닥 붙은 앵두를 따 먹고 학교에 가서 나눠먹기도 했다.


여름이 다가올 때 담장에 호박덩굴 사이를 들치면 갸름한 애호박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호박이 열릴 때만 되면 늘 할머니댁을 드나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지 먹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기름에 지져져 살짝 퍼진 애호박이 간장과 어우러진 맛은 그때 그 시절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던 내게 커다란 선물 같았다. 그때 그 순간, 참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속도 속이 아니었을 것인데... 어찌 사셨을까!

"할머니~" 하고 뛰어들어오던 나를 분명 먼저 보낸 딸로 맞이하셨지 않았을까. '우리 딸, 은숙아, 어서 오렴.' 환한 웃음 뒤에 짙은 슬픔이... 이제는 보이는데... 그 시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이었다.

유독 여름이면 피부질환인 가려움증이 심하셨던지 할머니의 자글대는 팔에는 피부 속으로 늘 핏발이 서 있었다. 가끔 밭에서 튀어나온 작은 청개구리를 잡아드시는 모습을 보고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약으로 드신 듯하다. 참으로 우리네 조상님들은 의료 혜택보다 민간요법에 의존하여 더 큰 병으로 키우는 환경에서 살았다는 것이 안타깝다.


고 3이 되면서 외할머니댁 출입이 뜸해졌다. 게다가 그즈음 외삼촌 내외분이 사업을 이전하며 살림을 합하셨다. 이후로는 명절 때만 보는 데면데면한 인연이 되었다. 전에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외삼촌 부부께서 함께 사실 때는 거의 가지 않았다. 중학교 이후 몇 년 외삼촌께서 사업차 도시로 분가하셨을 때만 줄곧 드나들었다. 그래서인지 외할머니만 빼고는 외가 친척에 대해 살가움이 적다.


대학생이 되면서 늘 버스로 통학해야 하니 할머니를 잊고 살았다. 할머니가 많이 서운하셨을 것 같다. 왜 그때는 그런 도리도 몰랐을까. 그리고 받은 사랑을 갚을 줄도 몰랐다.




대학 생활이 시작되고 익숙해져 갈 때쯤이니 2학년이었던 것 같다.

겨울이었다.


어두워진 저녁쯤 귀가했다. 집 문을 들어서는데 안에서 할머니께서 소리치셨다.

"ㅇㅇ야, 네 외할머니 돌아가셨단다."


난 들어가다 말고 나와 외할머니댁으로 달려갔다. 입관 전에 할머니 마지막 모습이라도 뵙고 싶었다.


그 정든 담장이 어스름 보일 때쯤부터 환한 조의 등이 보였고, 이미 북적이는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뛰어들어갔다. 마당부터 가득 찬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좁은 부엌을 통과해 마루를 거쳐 큰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많은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는데, 부엌에서 나오던 외숙모가 날 보시고는 이상하게도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어, ㅇㅇ왔구나."

외숙모는 하나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으셨다.

"예" 건조한 인사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나를 향해 뭐라 더 말씀하셨다. 그 낭랑하고 큰 목소리로 "얘 좀 봐. 장삿집에는 빨간색 옷은 안 입는 거야. 귀신이 얼씬하지 못하잖아. 넌 왜 빨간 옷을 입고 왔니?" 하며 웃으셨다. 다른 아주머니들이 쳐다보았다. 난 외숙모의 그 말씀과 웃음이 조롱으로 들렸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걸 모르나' 하는......


순간 나는 할머니 생각보다 창피함을 느꼈고 화가 났다. 내가 기대한 소리는 '어서 와라. 어여 들어가서 할머니 뵈렴.'이었다.


속으로 말했다. '그런 외숙모는? 시어머니 돌아가셨는데, 눈엔 시커먼 라인이나 그리고......'


외숙모는 멋쟁이셨다. 이미 그 시절 눈에 아이라인을 그리고 사셨다. 예전 하시던 사업이 화장품 대리점이었다. 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가꾸시던 분이셨다.


나의 ? 나의 빨간 옷은 겨울에 입고 다닌 단 하나의 재킷이었다. 그도 언니가 입던 반코트 물려받은 거였다. 대학생이 되니 언니가 입던 것 중 괜찮은 것으로 물려준 것이다. 학교 갔다 오며 소식 듣고 아무 생각도 없이 달려온 터였다. 사실 바꿔 입을 외투도 없었다.


여튼 외숙모의 그 말에 난 수치스러워서 그 발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시는 외가에 가지 않았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외삼촌에 비해 외숙모는 정이 많은 분이지만, 우리에게 좀은 인색하셨다. 어릴 때 명절 세뱃돈으로 두 분이 티격태격하시는 모습을 한두 번 목격한 후라 감정이 별로 안 좋았나 보다.




할머니 돌아가신 그날 이후에 내게 뭐라고 한 사람도, 왜 그랬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대학생씩이나 돼서 그리 행동하면 어쩌냐고 야단이라도 쳐 주었더라면, 그때 이미 울며 반성하고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을 것이다.


다른 가족들에 대해서는 글을 쓰면서 상처받은 내 마음도 치유받았다. 그러나 딱 한 분, 외할머니는 내가 상처받은 자가 아닌 고인이 되셨어도 내가 상처를 드린 유일한 분이다. 그래서 더욱 잊고 살았을지 모른다.


친할머니께는 마음을 충분히 드렸다. 그러나 정작 어린 마음에도 사랑을 느끼게 해 주신 외할머니께는 마음으로조차 보은 하지 못했다. 엄마 대신이었던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고관절 골절ㅡ지금은 수술로 충분히 재활가능한 ㅡ로 와상 상태로 고생하시다 떠나셨다.


할머니 돌아가신 이후, 나는 외가에 대한 정 없이 살았다. 집안 행사로 언니와 참석은 하나 남만큼이나 서먹한 사이로 지냈다. 그날의 일, 외할머니의 사랑을 배신한 것이라 담아두고 산만큼 외가에 대한 미움도 컸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지만, 나의 철없음과 어리석음이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음을 안다.


할머니, 그 사랑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없이 죄송합니다. 할머니께서 지금 저의 이 마음을 아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할머니의 평안한 영생을 위해 기도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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