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3> 인연의 흔적... 또 다른 할머니

외가의 추억

by 소망

봄이면 돌담장 위로 빨간 보리수가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쭉쭉 뻗은 가지에 무겁게 달려있고, 그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원 가운데 빨간 앵두가 다닥다닥... 생각만 해도 정겹고 따듯한 곳이다.


여름으로 들어서면 그 담장에 호박 덩굴이 온 돌담을 감싸고 사이사이로 말갛고 날씬한 호박이 예쁘게 매달려 있었다. 담장 사이 작은 턱을 넘어 마당에 들어서면 햇빛에 빛나는 보랏빛 가지, 뒤뜰에는 커다란 나무에 앙증맞은 감꽃이 맺히고 있었다. 마당에서 부엌을 가로질러 앞 채로 오면 바깥으로 향하는, 오래되어 삐걱음을 내는 작은 문이 있었고 그 문밖에는 향기를 풍기며 매달려 있는 살구가 있었다.

가을이면 뒤뜰 가득 채운 홍색 감, 철마다 가지가지 열매들이 풍성했다.


마당으로 직접 나올 수 있는 방의 긴 쪽마루에는 여러 가지 선인장과 그 꽃들이 나른한 햇빛 속에서 예쁘게 피어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가면 늘 그 쪽마루에 앉아 작은 정원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곳이 지금도 눈에 선히 그려지는 내 외할머니 댁이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욕쟁이 할머니로 통했다. 오지랖?이 넓으셨던 할머니는 온 동네 궂은일을 솔선해 도우셨고 무슨 일이든 형통하게 하셨다. 구시렁구시렁~ 혼잣말도 많으셨고 소리도 잘 지르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신뢰했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할머니의 말에는 정이 묻어 있었다. 진솔함이 배어 있었다. 어머니가 없던 내게 따뜻한 사랑을 주셨던 분이다. 내가 느끼는 한, 가장 날 아껴 주신 분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주 우리를 보러 오셨고 돌봐주셨다.

새엄마를 들이니, 저학년 때 잠깐 운영한 식당에 일을 도우신다는 명분으로 한 동안 늘 오셔서 일도 도우시고 우리를 챙겨주셨다.


1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그 시절 시골에는 땅을 파 놓고 거름으로 쓸 인분을 채워놓은 곳이 꽤 있었다. 넓은 밭인지 공터인지를 돌아다니다 들어오는 길에 인분에 빠져 똥독이 오를 뻔한 일이 있었다. 발이 빠져 정강이까지 인분과 냄새까지 묻혀 울고 들어온 나를 작두 펌프 앞에서 다 씻겨 주셨다. 걱정하며 씻겨주시던 할머니의 표정과 손길이 잊히지 않는다.

머니는 늘 식당으로 오셔서 우리를 보고 가셨고 이후에도 계속 사촌들과 이웃 아이들이 입던 옷을 얻어 날라주셨다. 어른이 되어 보니. 먼저 떠난 큰 딸의 어린 자식들에게 혹시나 있을 계모 구박을 감시하러 오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본성적으로 손자나 가족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많은 분이셨다.


고학년 때였다. 번은 외할머니 댁에 가서 밥을 먹고 상을 들고 나오다 엎은 적이 있다.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내려오는 중, 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접시들이 부엌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깨졌다.


할머니께서는 소리에 놀라시며

"아이코~ 어디 안 다쳤니?"


나는 이 한 마디에 눈물이 찔끔했다. 집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소리였다. 깨뜨리거나 실수하면 늘 야단을 맞았지 안 다쳤냐고 묻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난 그때 알았다.

'이럴 때는 이렇게 말을 하는 거구나.'

지금은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따듯하게 하는 말인지를 알지만,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는 환경 또한 내 교육의 부재였다.


친할머니와 살던 나는 살림을 도우면서 살았다. 설거지하다 그릇을 깨면 득달같이 들려오는 소리가 '에고 이년이 또 그릇을 깨 먹었네!'였다. 자주 듣던 소리이다. 그릇뿐 아니라 다른 것을 망가뜨리거나 실수하면 혼나기 일쑤였다. 어려웠던 살림이니 그러실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외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친할머니와 너무나 다른 반응을 보아서인지 난 그날의 느낌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쪽져 올린 머리에 비녀를 꽂아 고정시키신 흰머리, 자글자글한 주름 선한 웃음을 가지신 외할머니는 큰 딸인 우리 엄마와 우리에게 특히 잘해주신 큰 이모ㅡ둘째 딸ㅡ를 일찍 잃으셨다. 그 환한 웃음 뒤에 얼마나 쓰디쓴 고통을 숨기고 계셨을까.


내가 그 마당을 들어서며 "할머니~~" 부르면 겨울엔 부엌에서 아궁이 불 때시다가, 봄에는 마당 텃밭 귀퉁이에서 채소밭 가꾸시다가, 가을빛 좋은 어느 날엔 방의 창호문을 여시며 "ㅇㅇ 왔구나, 어여 와라." 하시며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셨다.


지금 생각한다. 나를 보며 웃으시던 할머니 마음을... '내 딸 은숙이 왔구나!' 하셨을 것 같다.




외할머니의 기억은 다음 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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