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의 추억
봄이면 돌담장 위로 빨간 보리수가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쭉쭉 뻗은 가지에 무겁게 달려있고, 그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원 가운데 빨간 앵두가 다닥다닥... 생각만 해도 정겹고 따듯한 곳이다.
여름으로 들어서면 그 담장에 호박 덩굴이 온 돌담을 감싸고 사이사이로 말갛고 날씬한 호박이 예쁘게 매달려 있었다. 담장 사이 작은 턱을 넘어 마당에 들어서면 햇빛에 빛나는 보랏빛 가지, 뒤뜰에는 커다란 나무에 앙증맞은 감꽃이 맺히고 있었다. 마당에서 부엌을 가로질러 앞 채로 오면 바깥으로 향하는, 오래되어 삐걱음을 내는 작은 문이 있었고 그 문밖에는 향기를 풍기며 매달려 있는 살구가 있었다.
가을이면 뒤뜰 가득 채운 홍색 감, 철마다 가지가지 열매들이 풍성했다.
마당으로 직접 나올 수 있는 방의 긴 쪽마루에는 여러 가지 선인장과 그 꽃들이 나른한 햇빛 속에서 예쁘게 피어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가면 늘 그 쪽마루에 앉아 작은 정원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곳이 지금도 눈에 선히 그려지는 내 외할머니 댁이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욕쟁이 할머니로 통했다. 오지랖?이 넓으셨던 할머니는 온 동네 궂은일을 솔선해 도우셨고 무슨 일이든 형통하게 하셨다. 구시렁구시렁~ 혼잣말도 많으셨고 소리도 잘 지르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신뢰했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할머니의 말에는 정이 묻어 있었다. 진솔함이 배어 있었다. 어머니가 없던 내게 따뜻한 사랑을 주셨던 분이다. 내가 느끼는 한, 가장 날 아껴 주신 분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자주 우리를 보러 오셨고 돌봐주셨다.
새엄마를 들이니, 저학년 때 잠깐 운영한 식당에 일을 도우신다는 명분으로 한 동안 늘 오셔서 일도 도우시고 우리를 챙겨주셨다.
1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그 시절 시골에는 땅을 파 놓고 거름으로 쓸 인분을 채워놓은 곳이 꽤 있었다. 넓은 밭인지 공터인지를 돌아다니다 들어오는 길에 인분에 빠져 똥독이 오를 뻔한 일이 있었다. 발이 빠져 정강이까지 인분과 냄새까지 묻혀 울고 들어온 나를 작두 펌프 앞에서 다 씻겨 주셨다. 걱정하며 씻겨주시던 할머니의 표정과 손길이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는 늘 식당으로 오셔서 우리를 보고 가셨고 이후에도 계속 사촌들과 이웃 아이들이 입던 옷을 얻어 날라주셨다. 어른이 되어 보니. 먼저 떠난 큰 딸의 어린 자식들에게 혹시나 있을 계모 구박을 감시하러 오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본성적으로 손자나 가족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많은 분이셨다.
고학년 때였다. 한 번은 외할머니 댁에 가서 밥을 먹고 상을 들고 나오다 엎은 적이 있다.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내려오는 중, 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접시들이 부엌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깨졌다.
할머니께서는 소리에 놀라시며
"아이코~ 어디 안 다쳤니?"
나는 이 한 마디에 눈물이 찔끔했다. 집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소리였다. 깨뜨리거나 실수하면 늘 야단을 맞았지 안 다쳤냐고 묻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난 그때 알았다.
'이럴 때는 이렇게 말을 하는 거구나.'
지금은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따듯하게 하는 말인지를 알지만,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는 환경 또한 내 교육의 부재였다.
친할머니와 살던 나는 살림을 도우면서 살았다. 설거지하다 그릇을 깨면 득달같이 들려오는 소리가 '에고 이년이 또 그릇을 깨 먹었네!'였다. 자주 듣던 소리이다. 그릇뿐 아니라 다른 것을 망가뜨리거나 실수하면 혼나기 일쑤였다. 어려웠던 살림이니 그러실 수도 있었겠지. 그러나 외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친할머니와 너무나 다른 반응을 보아서인지 난 그날의 느낌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쪽져 올린 머리에 비녀를 꽂아 고정시키신 흰머리, 자글자글한 주름 선한 웃음을 가지신 외할머니는 큰 딸인 우리 엄마와 우리에게 특히 잘해주신 큰 이모ㅡ둘째 딸ㅡ를 일찍 잃으셨다. 그 환한 웃음 뒤에 얼마나 쓰디쓴 고통을 숨기고 계셨을까.
내가 그 마당을 들어서며 "할머니~~" 부르면 겨울엔 부엌에서 아궁이 불 때시다가, 봄에는 마당 텃밭 귀퉁이에서 채소밭 가꾸시다가, 가을빛 좋은 어느 날엔 방의 창호문을 여시며 "ㅇㅇ 왔구나, 어여 와라." 하시며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셨다.
지금 생각한다. 나를 보며 웃으시던 할머니 마음을... '내 딸 은숙이 왔구나!' 하셨을 것 같다.
외할머니의 기억은 다음 회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