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좀 자 둬야지
WRITTEN BY 지랄방구
잠이 오지 않는 밤
모로코 탕헤르 공항.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면 이제 스페인이다.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왔다. 유럽의 끝을 지나 내가 태어난 달 12월이 되면 대서양을 건넌다. 아메리카에 간다.
요즘은 마음이 덤덤하다. 여행이 싫어졌다거나 몸이 지쳤다기 보다는 그냥 안정된 마음을 가지고 여행하고 있다. 흥분의 강도는 이미 줄어든지 오래. 한때는 정말 많은 것들에 샘을 느꼈었는데 그것은 특별히 '자기 감정 표현에 능한자들'을 향해서였다. 젊은 여행자들의 넘치는 에너지. 컨셉이든 보정이든 삐까뻔쩍한 사진들. 읽는이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유려한 문장을 쓰는 여행자들에게. '나는 왜 저들처럼 여행하지 못할까' 생각하기도 하고 괜히 '저런건 여행이 아니지, 내가 저런걸 못해서 안하는건 아니야' 라며 늘 그랬듯 샘나면서 안나는척 했다. 나는 왜 열과 성을 다해 호들갑떨지 못할까? 진심으로 고민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마저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거고 지금은 거기서 한걸음 비껴나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로 여행하고 있다. 이것이 좋고 나쁨이 아닌것을 깨달은지 아니 그렇게 인정한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여행이 생각보다 늘 환상적이거나 가슴벅차오르는 활동이 아니라 그냥 지금처럼 아침에 뜨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이런 날. 이 시간. 이 공기를 좋아하는 거다. 이런 순간이 장엄한 자연에 도취되는 시간보다 결코 못하지 않고, 가끔은 훨씬 더 내게 의미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여행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버스 안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그저 바라 보는 시간. 가끔 엄청난 풍경에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밭을 경작하는 농부들을 보거나 학교 끝나고 집에가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볼 때, 수십 마리의 양들을 치고 있는 주름 깊은 노인의 얼굴과,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가는 아랍여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런 시간이 나는 좋았다. 그 감정을, 그 순간을 적확하게 표현하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글재주라 아쉽지만, 그래도 "좋았다" 말고는 다른 말들은 다 감정과잉으로 여겨질 정도로 그 순간은 내게 아름답다. 다른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대체할 다른 말을 찾지 못하는 그 지극한 현실을 경험하는 순간순간이었다.
나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내 감정, 여행을 바라보는 태도, 표현의 섬세함이 얼마나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끝날때까지 이렇더라도 나는 좋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