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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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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Sep 17. 2023

엄마, 나 할머니 될 때까지 미국에서 살래

미국생활 25-27일 차



여전히 아이의 적응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남편은 최선을 다해 아이와 놀아주고 있고 나도 모든 일을 제쳐놓고 있다.


힘들다. 아이에 집중하느라 공부는커녕 수업에서 시키는 것도 제대로 못 해가고, 사회 활동은 할 엄두도 못 내는 건 별거 아니다. 하지만 그냥 아이가 힘들어하니 힘들다.


오늘, 길에서 잠든 딸내미


오늘은 주말이라 기분 전환 차 나들이를 계획했는데, 유니언 스퀘어 파머스 마켓을 간다는 게 엉뚱한 유니언 마켓으로 가버렸다. 오며 가며 공연히 아이 데리고 지하철만 몇 번을 갈아탔다. 가는 길에 아이에게 동영상을 보여주고 나는 새로 살 노트북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쓰던 노트북이 도저히 못 쓸 수준이라 다음 주 월요일 수업 전에 사야 했다.) 남편은 계속 거기에 정신 팔려 있지 않았으면 중간에라도 잘 못 온 걸 알 수도 있지 않았냐고 화가 났다. 지하철 몇 번을 갈아타고 오래 이동한 아이도 힘들어했다.


결국 사긴 샀는데 윈도우만 쓰다 쓰니 쓸 줄을 모르겠다… ㅋㅋ


이제까지 힘 빠지는 일들이 있어도 나름 빠르게 회복을 했는데, 이번에는 힘이 안 났다. 그냥 울고만 싶었다. 나 때문에 온 거니 내가 힘내고 이끄는 건 맞는데, 나도 잘 모르겠고 나도 힘들고 감당도 안되는데 좋은 소리 듣는 일도 없다.


아빠 유학생들은 나보다 가사나 육아에 신경을 덜 쓰고 공부에 집중하던데, 내가 엄마라서 더 힘든걸까. 사회적인 굴레 때문에 더 힘든 걸까 남편 말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데 내가 나서서 신경 쓰느라 공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걸까. 근데 현실적으로 남편도 힘들어하고 하나하나 다 나한테 물어보는데, 신경을 어떻게 안 쓸까. 부모님도 남편과 아이에게 더 잘하라고 걱정하시고. 나 자신도 온지 며칠 되지도 않은 가족들보다 공부를 앞세우고 싶지는 않다. 너무 힘들고 갑갑해서 한동안은 땅만 보고 걸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울 수도 없었다.


그래도 다음으로 향한 미술관에서, 아이와 미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남편도 도슨트 프로그램에 보내면서 둘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약간 정신을 차렸다.


도슨트 마치고는 멋진 미술관 카페에서 샌드위치랑 빵도 사먹고


그래서 한참을 다시 다니다가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왔다. 아이는 걷다 보니 힘들어져서 나중엔 많이 보챘고, 중간에는 아이가 잠이 들어 길에서 오도 가도 못하기도 한 데다가,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더니 허기도 졌다.


하이라인에선 아이가 벤치에 빠져서 벤치 가지고만 한시간을 논 것 같다. 하이라인은 백미터도 못 걸었다 ㅋㅋ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아 힘들지만 재밌는 하루였다.'라고 했다. 옆에서 남편이 '애가 립서비스를 하네'라고 웃었다. 함께 웃는데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우리 내년에는 어디 있을 거야?' 무슨 말인가 하는데 아이가 다시 말했다. '우리 계속 미국에 있자. 할머니 될 때까지 미국에 있자.'


아이는 엄마 아빠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지금이 좋은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엄마아빠가 등원길에도 늘 함께하고, 일찍 하원하고, 항상 저녁을 같이 먹는다. 놀러도 많이 다니고.


다른 날 WTC 근처 산책 중, 코끼리랑 토끼 만난 딸내미


마음이 우르르 놓였다. 어린이집이 힘들어도 어떻게든 전반적으로는 잘 지내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아이가 느끼고 있었다.


어린이집도 조금 나아진 걸까 싶었다. 원래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던 아이였다. (이 말을 하며 울 때마다, 우는 아이에게 '한국에 가고 싶어?'라고 물은 남편을 째려보곤 했다.) 최근 등원 길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약해졌고 하원길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는데, 오늘 말을 듣고 보니 나아지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오늘 아이의 이 말을 안 들었으면 어쨌을까 싶다. 마음에 응어리가 조금 풀린 기분이었다. 몸도 마음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냥 몸의 피로만 남았다. 힘내서 저녁을 차리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하다. 아이만 괜찮으면 모든 게 괜찮다. 힘든 것도 다 아이 걱정에 힘든 거였을지도 모르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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