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83일 차
일주일에 400장은 족히 되는 리딩 숙제들을 해내면서 학기 초에는 패닉에 빠졌었다. 미국 애들도 힘들어하는 분량을 안 되는 영어로 하자니 감당이 안되었다. 한 달쯤 지나고부터는 양이 감당이 도저히 안돼서, 리딩을 하는 비율도 점차 줄이고 번역기도 쓰기 시작했다. 번역기를 돌리고 원문이랑 다시 번갈아 가며 읽느라고 리딩에 쓰는 시간이 딱히 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글을 보는 게 조금 더 편해서 계속 중간중간 썼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영어가 조금씩 더 안 되는 기분이 들었다. 학기 초에는 그나마 행사도 많고 서로 알아가느라고 영어 대화도 많이 했고, 억지로나마 리딩도 했는데, 혼자서 번역기 돌리며 공부하다 보니 영어가 오히려 퇴보하는 느낌이었다. 그 상태에서 조모임들이 몰아닥치니 내 입은 계속 어버버 거리기만 했다.
마침 쓰던 서비스의 한 달 무료 체험이 끝나기도 했고, 그래서 다시 번역기를 안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달쯤 되었는데, 이제는 다시 영어가 조금 읽힌다. 뭐 전보다 딱히 잘 읽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영어 문서를 봤을 때 부담감은 확 줄었다. 학기 초에 느꼈던 것처럼.
버티기가 중요한 것 같다. 하기 싫은 일이라도 경력 때문에 버텨야 할 때가 있고, 싫은 자리라도 관계 때문에 버텨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눈에 정말 안 들어와도 영어도 읽어내고 말해 버릇해야 는 것 같다. 뻔한 얘기지만 종종 그걸 까먹을 때가 있다. 아님 피곤해서 까먹은 척하거나. (아, 버티기 기술을 시전 하려면 피곤해서 까먹은 척할 수 없도록, 버티다가 쓰러지지 않도록, 버티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일을 감당 가능하게 만들어 두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