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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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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Nov 29. 2023

답해야 한다는 부담감

미국생활 89일 차



생일 전야였다. 사실 생일 당일도 크게 챙기지 않는 편이라, 평소엔 생일 전야랄 게 없었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한국과 시차가 있다 보니 전날 밤에 축하 메시지들이 왔다. 올해는 평년보다 축하 메시지가 더 왔다. 미국에 있는 내 소식도 궁금하고 타지에 있으니 더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


딸내미가 주고 싶어 못 견뎌서 하루 미리 받은 생일 선물 ㅎㅎ 다 컸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고마운 한편 부담도 느꼈다. 생일날 계획이 있어서 급하게 숙제를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메시지가 오니 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사실 아무도 답을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더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얼른 숙제를 해야 했는데. 결국은 답을 먼저 다 하고 졸린 상태에서 숙제를 마무리했다. 숙제가 하기 싫었던 탓도 있지만 분명히 메시지 자체에도 압박감을 느꼈다. 반갑고 고마운 건 맞는데, 숙제가 있는 상황에서 메시지가 쌓이는 게 압박감이 느껴졌다.


메시지가 왔을 때 답을 안 하면 불안하다. 차라리 안 읽으면 좀 나은데, 읽고 나면 혹시 까먹고 답을 안 할까 불안하다. 잡담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경우 - 약속을 잡는다든지 뭘 알려줘야 한다든지 - 에는 까먹는 게 두려워서 바로바로 해치운다. 미국에 와서는 시차도 있다 보니 메시지를 너무 오래 확인하지 않으면 미안한 느낌도 든다. (남편이 보면 식겁할 얘기다.) 아무래도 오랜 회사 생활에서 생긴 직업병인 것 같다. 신입사원 때부터 연락을 즉각 즉각 받아야 하는 환경에 있었다. 한밤 중이나 새벽에도 연락을 받곤 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도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고, 나도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할 만큼은 연차가 쌓였지만, 한번 그렇게 배운 건 쉽게 어디 가지 않는다.


전에 남편과 같이 반차를 내고 부부 워크숍에 갔다가 서로의 꿈을 알고 있는지 얘기해 보는 시간이 있었다. 남편은 내게 바로 '네 꿈은 임원이잖아'라고 했다. 너무 엉뚱한 대답이라 깜짝 놀랐다. 우리가 대화가 없는 부부도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했더니 내가 너무 회사 연락에 집착한단다. 그 정도로 열심이면 임원을 바라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 않아도 그런 줄 알았다고 남편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반차를 내고 워크숍에 와 있는 상황에서도 회사에서 연락이 오면 굉장히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도 바로바로 답하고 있었다. 그러느라 워크숍에 집중도 못하고.


웃긴 게, 요즘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람들 중에 우리 회사 휴직자가 두 명이 있는데 (둘 다 회사 내에서의 커리어 패스도 경영 직군으로 나와 비슷하다.) 둘 다 나랑 비슷하다. 메신저를 해봤자 다 노닥거리는 얘긴데, 허허실실 하며 얘기하는 것 같아도 사소한 질문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고 작은 약속 - 내일까지 뭘 알려달라든지 - 하나도 지나가지 않는다. 못 알려주는 상황이 되면 왜 못 알려주고 언제까지 알려주겠다는 연락도 다시 오곤 한다. 이러니 다들 삶이 피곤하다. ㅎㅎ


여기 있는 동안 마음 디톡스도 조금 해야겠다. 불필요한 것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맺고 끊을 줄 알고, 조금 더 단단한 마음을 만들 수 있도록. 언젠간 다시 일해야 할 텐데 그때의 나를 위해서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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