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130일 차
방이 추워 내내 애 이불을 다시 덮어주느라 잠을 설쳤다. 덕분에 하루종일 머리가 뿌연 상태였다. 그건 어제 11시가 돼서야 잔 딸내미도 마찬가지여서 둘 다 헤롱거리는 상태로 하루를 시작했다.
출근하는 친구가 챙겨주는 아침을 먹고(ㅎㅎ), 워싱턴 외곽에 있는 항공우주박물관으로 향했다. (Steven F. Udvar-Hazy Center)
들어가자마자 비행기 여러 대가 둥둥 떠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기들이 엄청 많은데 상당수가 공중에 떠 있고, 가계단 같은 것들이 있어서 떠 있는 비행기들을 볼 수 있어서 인상 깊었다. 비행기 중에는 민간에서 타던 것도 있고, 미군에서 사용한 것도 있고, 독일이나 일본 비행기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비행기가 있고 그 비행기를 이렇게나 넓은 공간에 모아놓고 보여줄 수 있는 건 미국이기 때문일 거다.
가장 하이라이트는 디스커버리호였다. 우리 집에 레고로도 있는 우주 왕복선인데, 실제로 우주에 다녀온 것이 전시가 되어 있었다. 주로 번쩍번쩍 광이 나 있는 다른 비행기들과 다르게 상당히 낡았는데 그마저도 멋져 보였다. 저 그을음은 대기권에 다시 진입할 때 생긴 건가 싶고 ㅎㅎ
주로 관심이 없어하는 남편이 보기 드물게 엄청 재밌어해서 신기했다. 또 관심이 생기니 아이가 보채면 더 짜증 나 해서 투닥거렸지만… 잘 있었다. ㅎㅎ 어차피 나도 피곤해서 내가 주로 애를 데리고 있었다. 결국에는 잠시 차에서 쉬다 오겠다며 나왔는데, 아이가 또 막상 잠은 안 자서 뭘 먹다 놀다 다시 나왔다.
나도 도슨트는 듣고 싶어서 이번엔 남편이 아이를 보고 내가 1시간쯤 투어를 다녀왔다. 배가 고프고 피곤해서 중도 하차했지만 역시 도슨트를 듣는 게 재밌었다. 뉴욕에서 런던까지 2시간 내에 주파하는 스파이 비행기 얘기라든지, 디스커버리 호에서 진행된 실험이나, 왜 우주선에서 샤워 시설이 없어지고 변기 구멍이 작은지 등등 재밌는 얘기가 많았다. 혼자 듣기 아까워서 중간중간 남편에게 중계를 했다. ㅋㅋ
그 사이 아이는 박물관에서 아이용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동물 이름 붙은 비행기 찾아서 이름 쓰기를 다 해냈다. 이제 알파벳을 몇 개는 알고 곧잘 보고 따라 쓰기도 해서, 거의 다 아이가 써서 가져갔다. 넓은 곳을 다니며 힘들게 한 땀 한 땀 써갔는데 배지를 선물로 내밀길래 나는 내심 비행기 접기 모형이라도 괜찮으니 크기라도 컸으면 좋겠는데 아이가 실망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이가 좋아하며 가슴에 달아달라고 했다. 아이가 참 멋져 보였다.
이곳의 유일한 단점은 점심 먹을 곳이 없다는 점이다. 보통 때면 뭘 싸갔겠지만 친구집에서 가는 거라 안에 있다는 쉑쉑만 믿었는데 줄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매점이 한 군데 있기는 한데 음료수 빼고는 다 매진이고. 아이는 싸 간 요구르트, 치즈, 그래놀라 바, 과일로 어떻게든 해결을 하긴 했다. (한국에서는 허술한 점심이라도 여기서는 그게 보통이다. ㅎㅎ 나도 적응했고 아이도 더 좋아한다.)
남편은 옆에서 몇 개 집어 먹은 걸로 괜찮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당도 떨어지고 힘들어서 나가자마자 가장 가까운 드라이브 스루가 되는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남편이 잠깐 기름 넣고 가자고 주유소로 꺾는데 나도 모르게 이상한 비명 소리 같은 걸 질러서 남편이 다시 차선으로 진입했다. 안 그래도 오랜만에 파파이스를 먹고 싶었는데 이 기회에 먹었다. 기름이 배에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맛은 내 기억보다 그냥 그랬다. 이제 너무 많은 치킨을 먹어본 걸까. 맵긴 했는데 딱히 인상적이지 않아서 차라리 KFC가 낫나 싶었다.
친구 집에 와서 잠시 쉬다가 베이징 덕을 먹으러 갔다.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친구 남편이 어려서부터 가던 최애 식당 이래서 기대를 했는데, 역시 남달랐다. 껍질이 바삭바삭한 근본 있는 식당이었다. ㅎㅎ 사천식 가지 요리나 군만두, 청경채 볶음 같은 다른 중국 음식도 먹었는데, 미국 와서는 처음 먹는 중국 요리라 그런지 더 맛있었다.
아이는 잠시 유튜브 내니에게 맡기고 친구 부부와 그들의 또 다른 친구 한 명과 남편과 수다를 떨었는데, 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근무한 적 있는 친구 부부와 잡 지식이 많은 그들의 친구와 함께 한국과 미국의 차이에 대해 얘기하며 재밌게 놀았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한국이 참 안전하고 공교육도 무료고 (물론 사교육이 비싸지만 그건 미국의 사립학교 학비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의료 시스템도 훌륭하고 재활용이나 에너지 효율을 생각하는 것도 선진적이고 좋은 곳이었다. 역시 다들 서로의 좋은 점만 본다. ㅎㅎ
돌아와서는 아이를 재우고 친구 부부와 남편과 함께 영화를 봤다. 전형적인 Holiday movie에 약간 병맛이었는데, 이런 시즌에는 이런 걸 봐줘야지 ㅎㅎ 전에 핼러윈 때 친구집에 가서 비슷한 Holiday movie를 봤던 기억도 나고 재밌었다. 남편과도 오랜만에 같이 영화를 보는 기분이 색달랐고. (이 부분을 쓰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서 그 영화는 아주 별로였고 시간이 아까웠다고 한다 ㅋㅋㅋ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