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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뉴욕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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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대리 Jan 19. 2024

살아남기 위한 우선순위 조정

미국생활 152일 차



살아남았다. 오늘을 살아 넘길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어떻게든 됐다.


시작은 힘들었다. 남편은 달리기를 하러 가고 아이를 혼자서 등원시키는데, 매일 같이 하는 일인데도 버거웠다. 아이를 깨워야 하는데 나도 못 일어나고, 쪼그려 앉아서 신발을 신기는데 왜 나오지도 않은 배가 당기는지 모르겠다. 매일 같이 하는 일인데도 등원만으로 지쳐버렸다.


억지로 힘을 내서 점심거리와 간식을 챙겨서 이 추위에 30분을 걸어 수업을 갔다. 꼭 오늘 같은 날 수업이 멀리서 있다. 10시부터 저녁 6시 40분까지 연달아 수업이 3개나 있었다.


뉴욕은 계속 춥고 눈이 온다. 오늘 아침에도 학교에서 눈 조심하라고 연락이 왔다.


첫 수업은 분명히 괜찮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졌다. 속이 안 좋아 아침을 조금만 먹고 갔더니 금방 배가 고파지고 또 속이 안 좋아져서, 수업 내내 눈치 보면서 고구마 조각들을 입에 넣었다. 이대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두 번째 수업은 포기했다. ㅋㅋ 어차피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업 중 하나만 선택하려고 했었다. 평소 같으면 첫 번째 수업이 아무리 마음에 들었어도 두 번째 수업까지 들어보고 결정했을 텐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싸간 점심 도시락만 까먹고 30분을 걸어서 집에 와서 1시간을 자고 다시 30분을 걸어서 돌아갔다. ㅋㅋ 그래도 한숨 자고 나니 세 번째 수업은 아주 조금 나았다. 강의실에서 꿉꿉한 냄새가 나서 그건 힘들었지만.


다만 중간중간 간식을 챙겨 먹었는데도 수업이 마치니 너무 배가 고팠다. 보통은 6시면 저녁을 먹는데 이미 6시 40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30분을 걸어서 집에 가서 음식을 챙겨 먹을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그래서 바로 근처에 있는 아무 일본 라멘집에 가서 라멘을 사 먹었다. 팁까지 24불. 오늘 환율로 약 3만 2천 원이다. ㅋㅋ 대단한 맛집도 아니고 가족이나 친구랑 함께인 것도 아니라 평소 같았으면 진짜 안 사 먹었을 텐데 질렀다. 밖에서 음식을 먹으니 내가 집에서 해 먹을 때 보다 훨씬 잘 들어가서 반 그릇은 먹었다. 집에서는 아무리 조리 식품을 사서 차려먹더라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의 입덧이 올라와 버리는데, 식당에서는 적어도 음식이 나온 이후에 입덧이 올라오기 시작하니 그 사이에 얼른 먹을 수가 있었다.


기대가 없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ㅎㅎ


두 번째 수업을 포기한다던지, 혼자 외식을 한다던지. 지난 학기였으면 없었을 일인데, 입덧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려니 행동이 달라진다. 살아남기 위해서 우선순위나 판단 기준을 바꾸고 있는 거다.


앞으로 입덧이 심해지고 아이가 태어나면 이런 일들은 점점 더 빈번해질 거다. 임신 후 처음으로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오늘 그 시작점을 본 것 같다. 내 삶이 어떻게 얼마나 바뀔지 긴장도 되지만,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하련다. ㅎㅎ 잘 적응해 나갈 수 있다!




+) 남편은 옆에서 또 다른 적응 전략을 하나 제안했다. 냄새 때문에 힘들면, 음식을 할 때 코를 막고 하란다. 적당히가 아니라 꽉 막으면 된단다. 굉장히 진지한 제안이었다. 음... 그렇게 까지 해서 내가 음식을 꼭 해야 할까?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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