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주차] 꿀떡꿀떡 넘어가는 생 파스타

음식임신일기

by 솜대리




다시 음식 책을 읽을 수 있다! 책도 좋아하고 음식도 좋아하니 음식 책을 항상 가방 속에 침대 맡에 쌓아두고 지낸다. 그런데 입덧을 하면서는 책 마저 그림의 떡이었다.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닌데 음식 관련 글만 읽어도 속이 부대꼈다. 먹지도 못하는데 읽지도 못하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유다! 입덧이 끝나면서 음식뿐 아니라 독서에 대해서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심사숙고해서 고른 입덧 후 첫 음식 책은 '앗 뜨거워'. 한 중년 남성의 요리 세계 탐험기다.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작가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가 막내부터 일을 시작하며 자신의 고군분투기와 주방의 모습을 기록한다. 그렇게 1년쯤 일해 한 코너까지 담당할 만큼 성장한 작가는 이번엔 이탈리아 본토로 직접 건너간다.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시골로 들어가 현지의 파스타와 정육법을 배운다.


작가랑 공통점이 많아서일까, (요리 일을 시작하기 전의 작가와는 음식을 좋아하는 직장인이자 음식 관련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푹 빠져서 재밌게 읽었다. 작가가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거듭나고 전통 속으로 들어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나도 당장이라도 이 세계로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배우고, 나는 한식을 좋아하니 외국이 아닌 우리나라 시골 어디 어디를 다니며 어떻게 해야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현실은 입덧에서 막 벗어난 임산부. 아직은 간단한 집밥도 버겁다. 큰 꿈들은 잠시 보관해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 생 파스타를 먹으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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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파스타는 일반적으로 마트에서 파는 건면 파스타와는 다르다. 가장 간단한 차이는 단단함의 정도다. 말려서 만든 건면 파스타는 단단하지만, 생 파스타는 보들보들하다. 건면 파스타는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해 성형한 후 말려서 장기 보관이 가능하다. 하지만 계란을 넣어 반죽한 생 파스타는 보관 기간이 길지 않고 필시 냉장 보관해야 한다.


fresh pasta.PNG 갓 만든 생 파스타, 사진 출처: 유튜브 Tasty 채널


생 파스타는 주로 이탈리아 북부, 건 파스타는 남부에서 많이 먹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과거에는 이탈리아 가정에서 생 파스타를 직접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에는 그 빈도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동네 구석구석에는 파스타를 전문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에서 그 날 만든 생 파스타를 구할 수 있고, 파스타를 파는 많은 식당에서는 직접 생 파스타를 만든다. '앗 뜨거워'의 저자도 이탈리아 시골의 작은 식당에 가서 파스타 만드는 법을 배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생 파스타를 다루는 곳들이 많지는 않다. 10여 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생 파스타를 처음 먹어본 후 한국에 돌아와서 생 파스타를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생 파스타를 파는 곳도 드물었고, 판다 해도 현지에서 먹은 것과는 크게 달랐다. 하지만 10년 사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본격적인 이탈리안 레스토랑들이 늘어나면서 직접 생 파스타를 만들어 요리하는 곳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고, 호평을 받는 곳들도 있다. 내가 찾아간 식당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셰프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이번에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주변의 평은 꽤 좋았다.


파스타는 2가지를 시켰다. 버섯 크림 파파르델레, 그리고 시금치와 베이컨으로 속을 채운 라비올리였다. 애피타이저는 맛있게 먹었지만 파스타는 과연 어떨까 싶었다. 한국에서 생 파스타는 실패한 적이 너무 많았다. 정작 먹고 싶은 건 파스타였는데 파스타가 맛없으면 어쩌지 괜히 긴장까지 되었다. 두근두근하며 두 가지 파스타를 하나씩 먹어보았다. 아. 맛있었다. 매끈한 파파르델레면은 소스에 잘 버무려져 부드럽게 식도로 꿀떡꿀떡 넘어갔고, 라비올리는 역시 매끈하면서 소스와 잘 어우러졌다. 속에 들어간 시금치와 베이컨의 양도 간도 적절했다.


20190524_184150.jpg 이 날 먹은 파스타. 가운데가 파파르델레, 오른쪽이 라비올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언제나 즐겁지만, 맛있는 면을 먹으면 그 즐거움은 특히 더 배가 된다. 면을 특별히 다른 음식보다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희소성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는 쌀이 주식이다. 면 요리도 있지만 비중이 크지 않다. 외국 음식이 유입되면서 외국의 면 요리도 많이 들어왔지만, 현지에서 먹는 것에 비해 아쉬운 경우가 많다. 소스까지는 어떻게 된다 해도 면 자체가 맛있기는 특히 힘들다. 그래서 면 요리가 발달한 나라에 가면 면을 내내 먹게 되고, 우리나라에서도 맛있는 면을 먹으면 말도 안 되게 행복해지는 모양이다. 이번에도 엄청나게 행복했다. 맛있는 면을 먹어서 말도 안 되게 행복했고, 추가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좋았다. 산해진미를 가져다 놔도 먹지 못했던 아픔들이 스르륵 녹았다.


20190514_182602.jpg 지난주에도 다루었던 대만의 수제 면. 면이 얼마나 맛있는지, 소스와 고명은 별게 없었는데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이제까지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맛있는 음식이 있고 배가 고파도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 상황은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상황에 놓였고, 대체 그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었다. 사실 맛있는 음식을 눈 앞에 두고 못 즐기는 사람은 굉장히 많을 것이다. 임산부가 아니라도 다른 건강 상의 이유나 심리적인 이유로 그럴 수 있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뭘 가진지도 모르고 있었다.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시간이지만 덕분에 내가 가진 것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입덧을 결코 좋은 경험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이 날 내가 생 파스타를 먹으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오랫동안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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