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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직장인 스토리 #06. 명함을 잃는다는 것(1)

중년 남성들에게 일과 직장은 어떤 의미이고 존재인가


"저는 놀이터라고 생각해요. 놀이터라는게 노는 이런 개념보다도, 항상 나한테 즐거움을 주고 늘 새로운 거였거든요. 늘 남들이 안했던 일들을 제가 해왔기 때문에 항상 저는 제일 먼저 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까 늘 새로운 걸 한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대기업 퇴직임원 A)



직장과 일은 삶의 공간이자 삶의 의미

  우리나라 중년남성에게 ‘직장’은 단순히 일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눈뜨면 서둘러 출근하고, 늘 똑같은 곳에서 익숙한 동료들을 만나 같이 일하고, 밥 먹고, 소주잔도 기울이며 어울리는 일상생활의 영역이자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공적 영역을 의미한다. 


“아침 먹으면 수저 놓자마자 빨리 옷 갈아입고 나갔다가, 저녁 늦게 일 끝나고 나서 친구들하고 소주 한잔 마시고 콧노래 불러 가며 별님, 달님 보면서 집에 오는 것이 29년 동안 해 온 제 생활이었어요.” (OOO, 60세). 출처: 한국고용정보원(2018) ‘이제는 신중년으로’


직장과 일은 삶의 활력소이자 원동력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고
유능감, 자부심 같은 심리적 만족과 보상을 주는
삶의 공간이자 삶의 의미


  또한 중년남성에게 직장과 일은 생계수단으로서의 의미도 크지만 즐거움을 주고, 새로움을 찾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자 대상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주중이나 주말 구분도 없이 거의 모든 생활은 회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슈가 있을 때는 출근할 때부터 밤에 자기 전까지, 심지어는 밤에 자다 깬다니까. 안풀리는 문제 그거 생각하고 앉아 있어요. 그러니까 생활이 일인거 같애요.” (중견기업 임원 B). 


  이들에게 직장과 일은 삶의 활력소이자 원동력이고, 몰두할 수 있는 무엇이며, 성공과 성취를 추구하고, 자신의 열정을 다 바쳤던, 나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의 중심이었다. 비록 그것들이 밤잠을 설치게 하고, 역할 과부화를 느끼게 하는 머리 아픈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성취감과 즐거움을 제공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일은 그리고 직장은 유능감, 자부심, 존재감 같은 심리적 만족과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삶의 공간이자 삶의 의미이며, 청춘의 정열을 바친 곳으로 자신과 거의 동일시한 존재였다.




올라선 계단의 끝

“한식집 불러내서 얘기하더라구요, 충격이었죠. 저는 내년에도 계속 이 일을 하는 걸로 생각했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정말 충격을 받아가지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철이 없는거 같아요, 진짜로. 누구나 닥치는 일인데… 그게 내 일이 된다고 생각 안했거든요. 바보였던거죠.” (대기업 퇴직임원 C씨)


  중년 남성들은 퇴직은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고, 주변에서 계속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당장 자신의 일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몇 년간은 더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퇴직은 ‘비자발적이고, 갑작스러운’,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조건의 조합은 트라우마 즉 외부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심리적 외상에 비유할 만하고, 이러한 충격은 퇴직 이후 초기 대응을 어렵게 만든다.


“매일 하던 일이 있잖아,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업무나 일과들이. 근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딱…. 아침에 일어났는데, 갈 데가 없는거예요. ‘어? 오늘부터 출근 안해도 되지’ 이 생각이 드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대기업 퇴직임원 D씨)


“아침에 애 학교 데려다 주고, 갔다 오면 인터넷이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밤에는 애 올 때까지 TV나 이런거 보다가 애 오는거 보고 자죠. 퇴직을 하고 나니까 너무 시간이 많은 거예요.” (대기업 퇴직임원 E씨)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중년 남성들에게 비자발적이고, 갑작스러운 퇴직은 충격 그 자체였다. 퇴직이라는 사건은 30여년 가까운 시간 동안 너무나 익숙하고 안정적이던 생활패턴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렸다.


  또한 자신이 다니는 직장과 직위를 통해 다양한 공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가졌던 높은 자부심과 유능감을 파괴하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공간이자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듬으로써 급격한 변화를 겪게 한다. 중년 남성에게 퇴직은 30여년 동안 직장생활과 일을 통해 형성해왔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비자발적’이고 ‘갑작스러운’ 퇴직은 충격 그 자체
삶의 공간, 삶의 의미를 급격히 해체시키고
외상 경험처럼 인지와 정서를 마비시켜…
퇴직 이후 대처와 적응에 가장 큰 장애물


  특히 한국 사회 중년 남성의 경우에는 명예퇴직, 희망퇴직 등으로 인해 비교적 젊은 나이에 비자발적으로 퇴직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 더해 성장기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남녀의 역할 구분이 뚜렷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 인해 퇴직이 새로운 삶의 기회라기보다는 위기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내가 회사에서 ‘잘렸다,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자신을 지탱해 온 유능감, 존재감을 상실하게 하고, 그동안 회사의 후광, 직책과 지위가 주는 파워를 통해 행사해왔던 통제감을 상실하게 한다. 이로 인해 퇴직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비견될 만큼 충격적’이라거나 ‘나의 전부를 잃은 것과 같은 절망’을 경험하게 한다. 


  퇴직은 이렇게 일상생활의 영역이자 그동안 몸 담아온 일터와의 분리로 생활의 안정감을 파괴하고, 사회적 역할을 빼앗아가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한순간에 상실하게 함으로써 ‘퇴직쇼크’라고 불릴 정도의 충격, 아쉬움과 당혹스러움으로부터 분노에 이르기까지 깊고 다양한 부정적 정서를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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