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호의도
사랑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비슷한 듯 다르다. 내 엄마의 애정 표현의 경우 특징적으로 크게 두 가지인데, 그 첫 번째는 이미 여러 차례 얘기했듯 맛있는 음식을 많이, 아주 많이 해 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걱정의 말 혹은 각종 조언들을 해 주는 것이다. 이제는 서로 매일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전화에 심지어 톡으로까지 자주 표현하시는데 그 많은 말들 중 잊을 만하면 자주 반복되어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자꾸 웃어야 된다. 웃어야 복도 따르고 일도 술술 잘 풀려.”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도 누가 나오면 저 사람 보라고, 웃는 상이지 않느냐며 본받으라고 말하고, 심지어 내가 뭔가 불편해서 잠시 표정이 굳어져 있다 치면 바로 다시 이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한동안 그냥 그게 그런 건가 보다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더 흘러 내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의 어느 날, 이와 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난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웃지 않아. 좀 만만하게 보일 수 있거든.”
그때는 그 친구도 나도 22살이었다. 내 앞에서는 자주 미소 짓고 종종 소리 내어 웃던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뭐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쩌다 벌써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보내고 무엇을 하든 어떤 표정을 짓든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던 그동안에도 돌이켜 보면 나는 자주 웃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지만, 나는 원래 그랬다. 누구와 함께 있을 때는 우는 것보다 웃는 게 더 편하다. 나에게 울음은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오롯이 혼자 있을 때 주로 나온다. 그마저도 이제는 오래 나오지도 않지만. 어쨌든 엄마는 내가 나이를 이렇게나 먹었는데도 아직도 자신이 자꾸 어떤 얘기를 해 주면 그게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아 그리 행동할 것이라 믿고 계시지만, 사실은 원래 나는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정말 이 웃음이라는 것이 어떤 신호로 보이기도 하나 보다. 내가 웃음을 보였다고 해서 나의 모든 것들이 다 괜찮은 줄 알기도 하더라. 그러니 이제 내가 뭐든 다 해 줄 것 같이 생각하기도 하더라. 어른이 되고 나서 종종 그런 상황들을 맞이할 때마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역시나 웃는 얼굴은 부담스럽지 않은 거구나. 대체로 그런 거구나. 그러니 대하기 쉬울 수 있구나. 그건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선을 넘으라는 얘기는 아닌데. 아무 말이나 다 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닌데. 아무 일이다 다 시켜도 된다는 얘기는 아닌데. 그럴 때는 참 난감해진다.
이렇게 골치가 아파질 때는 그러면 이제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무표정으로 일관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하지만 그 역시 아주 부자연스러울 테니 결국 나도 불편한 일이 아닌가. 물론 예의를 갖춰야 하는 지극히 공적인 상황이나 상대를 배려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들은 당연히 제외하고,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불편하기 싫다. 오래 화내고 싶지 않다. 웃을 때보다 화를 낼 때 몸도 마음도 훨씬 더 지치고 힘들다.
그러니 이제 어느 순간 누군가 나의 웃음을, 또한 되도록 함께 잘 지내고 싶어 하는 나의 호의를 함부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면, 그런 사람과는 되도록 멀리멀리 지내기로 한다. 한 번 맺은 인연이라고, 그사이 정이 들었다고, 또 그동안 내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고 해서 놓기를 주저하다간 정말로 어느 순간 나의 웃음을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다. 엄마가 그토록 반복해서 말하는 인생의 복을 불러온다는 그런 소중한 웃음을 말이다. 또한 내 곁에는 이미 나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과 함께 나누는 웃음과 호의의 소중함을 나 역시도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쉽게 잊지 않아야겠다.
매일의 이야기는 @some_daisy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