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인생

유향, 열녀전

by 승원

사회인으로 지낸 지 어언 반년이 되어간다. 꽤 어른이 된 느낌이다. 이제 슬슬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볼 여유도 생겼다. 직장인의 2대 허언은 '퇴사할 거야'랑 '유튜브 할 거야'라던데 또 막상 찾아보면 꾸준히 콘텐츠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일은 역시 치열하다. 내가 해보지 않은 일이 쉬워 보이는 법이다.


그런데 정말 콘텐츠 플랫폼이 많이 바뀌기는 했는지 입사 후에 선배에게서 "승원 씨도 전공 살려서 유튜브 채널 하나 운영해보지. 매력 있을 것 같은데 왜 안 해요?"라는 얘기를 실제로 듣기도 했다. 내가 유튜브라니. 누가 내가 하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듣는다고. "아유, 아니에요"하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래도 두고두고 생각나기는 하더라. 이후에 부장님이랑 이야기하다가도 "승원 씨도 승원 씨 책 하나 내보지 그래요. 재밌을 것 같은데." 하고 계속 소심한 나에게 헛바람을 넣어서 결국 브런치 작가까지 신청하게 된 것이다.


종종 어떤 글을 쓸까, 하고 고민하면서 길을 걷다가도 단조로운 나의 삶에서 끌어낼만한 요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작가들은 정말 많은 세상을 경험하고 공부해야겠구나, 싶어서 이제는 글을 봐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직접 해봐야 고충을 아는 법.


사실 이전의 나는 다양한 직업을 가지려고 시도해봤다. 대학에서 막 전공이 생긴 후에는 한국은행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한국'이 들어가니까 괜히 최고 같고. 그래서 계량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해보겠다 다짐했지만 미시경제학에서 이미 무너졌다. 진지하게 전공을 바꿔야 하나 고민할 정도여서 꽤 오래 우울했었다. 그 후에는 다들 도전한다는 고시도 해봤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시작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 목표의식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은데, 여하튼 학원에 가방 메고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도 주변에 계속 공부한 친구들이 합격하는 것을 보니 좀 아깝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들의 치열한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그 후엔 또 대학원에 진학해서 중국 문학 공부를 했다. 연구하고 글을 쓰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완성해냈을 때의 희열은 무엇보다 달콤했다. 중독될 수 있겠다고 느낄 정도였는데 이래저래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 삶은 조각보 이불 같네. 이것저것 괜찮아 보이는 것들이 다 모여 있어서 하나하나는 예쁜데, 그래서 모아둬도 딱히 나쁘진 않은데, 완성품이긴 하지만 그럴듯한 '걸작'의 느낌은 없다. 나는 늘 장인정신을 동경해오던 사람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 고작 나이 서른에 패배주의자 같은 이야기를 하기엔 좀 이른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망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싶어서 정말 마지막으로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행복할까, 하는 근심과 기대를 잔뜩 안고서.


"여자는 아무래도 공무원이나 전문직이지."


정말 많이 들은 말이고, 또 맞는 말이다. 그래서 슬픈 말이지. 저 한마디에 담긴 수많은 뜻을 내 동생도 이해할까? 나는 남자라서 누나보다 사는 데 있어서 좀 더 수월한 것도 있는 것 같아, 하고 내게 말하던 사랑스러운 그 아이는 나를 정말 많이 이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만큼 다각도에서 직업을 고민하진 않았을 것 같다. 특히 지금 이 나이에 가장 큰 고민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래서 출산을 하게 되어도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는가?' 이기 때문에. 아, 내 동생. 출산을 할 수 없다는 게 부럽다. 아이를 낳는다는 고결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그 혜택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져서 말이다.


공무원이나 전문직이 싫다는 말은 아니다. 너무 좋지. 조직에서 '나'라는 존재가 작게나마 기여하는 것들이 나라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꿈, 아니면 고시 합격자라는 명예, 그것도 아니라면 정년이 보장된다는 안정성. 그 무엇이라도 공무원은 좋은 직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가능성이 낮고, 수입이 꽤 높으며 역시 오래 일할 수 있는 전문직도 당연히 멋지다. 다만, 이 두 선택지가 꽤나 촉망받는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직업의 깔때기가 되어버린 현실이 슬플 따름.


여자는 어떤 존재인가. 사회에서 일하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면서도 차별받지 않고, 출산 여부와 관계없이 같은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면접에서 아직도 결혼 생각이나 자녀 계획이 없다는 뉘앙스를 풍겨야만 '일 열심히 하는 친구'로 인정받을 수 있나. 당신들의 자녀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고? 억울해서 한 번씩 이렇게 혼자 씩씩댄다.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곳에 진학하고 기쁜 중에, 그러니까 쌀쌀한 바람이 아직 불던 3월에 여자 동기들끼리 카페에 모여 했던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다. 파운데이션은 어떤 걸 쓰는지 립스틱은 뭔지 이런 화장품 얘기를 열심히 하다가 진로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나중에 애 낳을 생각하면 직업 고를 때 너무 힘들지 않아? 너네는 결혼해서 애 낳을 거야? 였다. 그때는 진지하게 얘기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슬프다. 스무 살이 가질 수 있는 꿈에 한계가 저렇게 명확히 그어져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것이 여성들이 거쳐야 하는 질문이라는 점이 지금도 뼈아프다. 그리고 난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옛날 여자들은 더 답답했을 텐데 어떻게 살았나 싶어서 예전에 선물 받았던 『열녀전』을 펼쳐봤다. 정조를 강요받은 열녀(烈女) 말고 여자들의 이야기를 나열했다는 열녀(列女). 뭐, 그래 봤자 비슷비슷하다. 좋은 어머니였던 여자들의 이야기, 유교적 가치에 따라 남편 뒷바라지 잘했던 슬기로운 여자들, 정조를 지켜낸 여자들, 절개와 의리를 가진 여자들. 그런데 맨 뒤에 언변이 뛰어나고 사리에 통달한 여성들을 이야기한 변통전(辯通傳)과 왕의 총애를 받아 재앙을 일으킨 얼폐전(蘖嬖傳)이 있었다. 얼폐전 이야기는 흥미롭긴 해도 '남성을 매혹한' 여성들을 악녀로 만드는 유구한 여성 혐오 서사라고 볼 수도 있는데, 변통전이 의외였다. 이 시대에도 할 말 다하고 사는 여자들 꽤 있었나 싶어서 웃음도 나고.


궁공이 왕 평공의 명을 받고 활을 만들게 되어 삼 년 만에 완성하였는데, 평공이 활을 당겨 쏘아보니 화살이 갑옷을 한 겹도 뚫지 못했다. 평공은 화가 나서 궁공을 죽이려 했는데, 궁공의 아내가 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였다. 그 아내는 왕에게 허물없는 자를 죽이지 말라 호소하고는 활 잡는 방법을 다시 알려주어 남편을 구했다.


간추린 내용이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평범하다. 그리고 여자가 말을 잘해서 해낸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남편을 구하는 일이나 가문을 세우는 일이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너무하긴 하다. 사실 『열녀전』은 전한 때에 쓰인 책이고, 전한 시기면 2천 년 전이니까 나름 파격적이다. 그래 봤자 남성이 쓴 여성상에 불과하네- 유교적 가치에 부합하는 여성들이네- 하는 이러저러한 점들을 빼고 보자면 말이다. 다양한 여성상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들 개개인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반가웠다. 그래,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지. 아니 근데 이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고...


그래서, 여자는 뭐 하고 사는 게 좋은데? 가만, 근데 왜 이 질문 앞에 '여자는'이 붙어야 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질문들이 나를 괴롭힌다. 닥치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한다고 말하기엔 코앞의 미래인 걸. 인생 별 거 없다는 엄마 말처럼 졸업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일까? 아니면 멋진 커리어 우먼? 그것도 아니면 그냥 살아지는 대로 일단 살아봐? 이 고민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계속될 것 같다.


여자라서,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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