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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신 Nov 03. 2019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난 내 삶을 살아가고 싶다.

"골고루 먹어야 튼튼한 사람이 돼요."

"....."

"시금치도 먹고, 콩나물도 먹어야지."

"난 햄이 좋아."


매일매일 햄과 고기반찬을 먹고 싶은 나이 4살. 하지만 부모님은 내 건강을 생각해서 골고루 먹으라 하신다. 하지만 난 내가 좋아하는 것만 먹고 싶다. 아마, 그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는 아니었다. (물론 이력서에는 이런 식으로 안 적는다) 약간의 과장을 더하여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청년정신의 시작이다.(대충 부모님 말 안 듣는다는 뜻) 


초등, 중등, 고등 교육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번번이 부모님의 벽 앞에 좌절을 했다. 더욱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 싶은 욕망이 가슴속 깊은 곳에 커다랗게 똬리를 틀며 자라나고 있었다. 인생을 건 첫 배팅은 고등학교 야자 거부.  고등학생이라면 당연히 새벽 6시에 등교해서 11시까지 야자를 하는 것이 당연시된 시대에, 소위 명문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야자를 안 한다는 것은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난 고등학교 시절을 날려버렸다. 


대학교는 경찰행정학과를 나왔다. 동기 대부분이 경찰관이고, 법원, 검찰, 국정원에서 일을 한다. 동기 70명 중 다른 길을 가는 친구는 단 3명. 언론인 1명과 금융업을 하는 1명 그리고 나. 난 대학시절 총학생회 활동을 했다. 진지하게 학생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쪽에서 활동하는 친구들도 제법 많다. 그리곤 난 내가 경찰관을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제법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 동기들도 기대를 하고, 교수님도 기대를 했지만, 난 시험을 포기하고 아주 먼 길을 돌아, 처음 부모님과 의견 충돌로 잠시 접어두었던 길을 가기로 했다. 난 그렇게 음식 하는 사람이 되었다. 


대기업의 외식사업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운명적인 한 여자와 결혼을 했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태어난 해, 난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주는 돈을 계속 받으며 살다가 가치가 다되어 버려질 것 같은 불안감에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다. 그 고민의 끝에 조심스럽게 떠날 준비를 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 이유는 아이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다. 아직 젖도 때지 않고, 걷지도 못하는 아이가 있는 가장이 선택하기에는 너무 위험 다는 것이다. 길을 바꾼 것이지 가장의 의무를 버린 것은 아니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지만, 누가 봐도 불안한 선택이다. 


죽기보다 싫은 출근을 하며, 삶의 공허가 내 마음을 갉아먹는 순간이 지나고, 나를 올바르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올 때쯤, 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깨우쳐 가고 있었다. 삶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노력이 결과에 비례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주위에는 스승들이 나타났다. 무협지에 나올법한 그런 순간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벽과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알려주었다. 벽을 넘거나 돌파하거나 아님 돌아가거나 결정을 해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 목소리가 외치고 있었다. '너에게 금지 시 된 것은 스스로가 만든 벽이다.'


사회가 만들고, 내가 만들어낸 벽을 넘어 난 내 삶을 살고 싶다. 지친 발걸음으로 벽에 기대에 쉴 수 있다면 편안할 것이다. 그 삶도 응원한다. 그리곤 다시 일어나 벽을 넘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것이다. 삶의 엔딩 크레디트는 결국 올라갈 것이고, 막은 내릴 것이다. 그전에 액션, 맬로, 코미디, 드라마, 서사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싶다. 


거 참 인생 빡시게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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