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뛰던 아이에게 보내는 뒤늦은

고기능 우울증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 현대인들을 위한 위로

by 메이다니

#10년 차 프리랜서, 나의 유능함은 불안에서 시작되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프리랜서라는 거친 바다에서 살아남았고, 남들이 보기엔 제법 괜찮은 성과와 수입도 거두었다. 하지만 내 안의 엔진은 늘 과열 상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녹슬어 버릴 것 같은 공포. 쉴 때조차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격증 공부를 하고, 스스로를 '일'이라는 감옥에 가두어야만 겨우 안심이 되었다.

심리학은 이런 나를 '고기능 우울증'이라 불렀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기능하지만, 속으로는 풀 엑셀과 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고 있는 자동차처럼 타들어 가는 상태. 나는 왜 이토록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에 익숙해졌을까.


#눈물이 마를까 봐 눈을 가리고 뛰던 아이

그 뿌리는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 있었다. 수학 85점을 맞았던 어느 날, 엄마에게 혼날 것이 두려워 눈물이 마르지 않게 손으로 눈을 가리고 집까지 뛰어가던 어린 내가 있었다. 문 앞에서 시험지를 내밀며 '충분히 슬퍼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했던 아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 존재의 가치마저 부정당할 것 같았던 그 공포가 30대의 나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불안을 없애야 할 질병으로 보지만, 사실 그 불안은 나를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경고음을 울려준 '가장 성실한 비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를 죽이려 한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사랑받고 살아남게 하려고 그 아이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껍데기만 남은 관계와 작아지는 나

불안한 자아는 관계에서도 발목을 잡는다. 과거에 깊이 애정했던 누군가 앞에서 여전히 작아지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상대는 나를 '자기 바운더리 안의 사람'이라 말하지만, 정작 다정함도 배려도 없는 무심함으로 일관한다. 그 껍데기만 남은 관계를 차마 놓지 못했던 건, 혹시 그에게 '선택받지 못한 나'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두려웠던 책임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입맛에 맞지 않는 식당에 굳이 단골이 되려 애쓸 필요가 없듯이,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관계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그 자리에 박제해두는 편이 낫다는 것을. 유물은 전시장에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가치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

우리는 늘 내 가치가 '돈'이나 '성과'에 묶여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프리랜서로 버텨온 10년의 세월이 증명한 나의 진짜 내실은 숫자가 아니었다. 모진 풍파를 견뎌낸 끈질긴 생명력,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읽어내는 감수성, 그리고 그 아픔을 다정함으로 승화시키려는 의지였다.

오늘 밤, 나는 나에게 뒤늦은 답장을 보낸다. 85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숨 가쁘게 뛰던 그 아이에게, 그리고 여전히 일중독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지금의 나에게.

"너, 정말 충분히 잘했어. 이제는 눈물을 닦고, 네가 선택한 기분 좋은 삶을 천천히 걸어도 괜찮아."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다면 위로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아무도 위로하지 않을 때는, 내가 나를 위로해주어야 한다, 혼자 태어난 우리 모두가 가진 숙명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제 어디에서 방황하는 당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가?


[작가의 Tip]

만약 당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깊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이제는 '성과'가 아닌 '나 자신'에게 써보세요. 맛있는 빵 한 조각을 온전히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엔진은 비로소 휴식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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