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많이 자는 걸 좋아해요.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끔은 잠이 나를 지켜주는 마지막 방어막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현실이 너무 버거울 때,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세상과 단절된 채 오래 자요. 그러다 보면 조금은 괜찮아지더라고요. 물론 모든 게 사라지진 않지만요.
멀리 도망치는 것도 좋아해요. 어릴 땐 군대로, 어른이 되고 나선 비행기 타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났어요. 누구도 나를 모르고, 나도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런 데 가면, 처음엔 멍해지다가, 서서히 나한테 집중하게 돼요.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뭘 놓치고 있었는지. 그렇게 마음을 다듬다 보면, 돌아올 때쯤엔 조금은 단단해진 기분이 들어요.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나 하나만큼은 조금 달라져서 돌아오게 돼요.
그래서인지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섣불리 말 못 해요. “괜찮아질 거야” 같은 말은 너무 가벼워 보이고, “이렇게 해봐” 같은 말도 경험해보지 않고선 함부로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내가 겪었던 걸 꺼내서 조심스럽게 얘기해요. “나는 그때 이렇게 했었어.” 그게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스쳐지나가기도 하겠지만요.
사실 저도 강한 사람은 아니에요. 웬만하면 이겨내기보단 피하고, 맞서기보단 돌아가요. 그래서 한때는 그런 내가 너무 싫었어요. 근데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도망친다고 다 나약한 건 아니더라고요. 큰 파도가 몰려오는 걸 뻔히 보면서, 굳이 그 물속으로 뛰어들 이유는 없잖아요. 잠시 해변으로 물러나 있어도 돼요. 바람이 잦아들고 파도가 가라앉은 후에, 다시 들어가면 되니까요. 나는 그게 살아내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혹시 당신도 나처럼 도망쳐본 적이 있다면, 그게 너무 부끄럽거나 비겁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버티지 못해서 피한 게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지금 당장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어도 괜찮아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도 괜찮고요. 그냥 그 자리에서 멈춰 있는 것도 용기예요. 그 순간을 어떻게 통과해냈는지가, 결국은 나를 다시 세워주더라고요.
그러니 괜찮아요. 도망쳐도.
그리고 언젠가, 나처럼 그 도망이 결국 나를 살리는 길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때까지,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