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은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한참을 서성였다. 고양이 밥그릇을 다시 확인했고, 셔츠를 두 번 갈아입었다. 넥타이 매듭을 여섯 번쯤 풀고 다시 맸다. 마음이 어지러울수록 손은 더 정리된 무언가를 찾았다. 머릿속엔 전날 밤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고, 그 감정의 잔열이 옷깃 안쪽까지 번지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가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리고 그가 문을 나설 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한 시간도, 들어서는 동선도, 인사하는 방식도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둘만 아는 온도, 둘만 아는 간격, 둘만 아는 감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하린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켰고, 마우스를 잡았으며, 메일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하지만 마음속에선 수없이 반복된 말들을 또다시 삼키며. 그 말들은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더 말로 꺼낼 수 없었다. “괜찮아요?”라는 인사조차, “잘 지냈어요?”라는 안부조차. 그건 모두 너무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준은 그녀의 자리를 스치듯 지나쳤다.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도, 굳이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주치지도 않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계산된 거리, 티 나지 않는 회피, 말보다 더 많은 걸 전하는 공기 같은 것들. 그는 회의 자료를 정리하며 몇 번이고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줄을 읽을 때마다 손이 아주 조금 멈칫했다. 그러나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팀 전체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조용한 식당, 낯선 조합의 테이블, 평소보다 더 건조한 대화. 하린은 팀장 옆에 앉았고, 준은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둘은 한 번도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누군가의 농담에 따라 웃기도 했고, 물컵을 채우기도 했다. 자연스러웠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그 밤을 더 선명하게 증명하는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를 보지 않으려 애쓰는 그 자세가, 그 자세 하나만으로도 어제 있었던 모든 것이 진짜였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둘이 오늘 유난히 조용하네.” 누군가가 무심코 말했고, 하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물을 마셨다. 준은 고개를 숙인 채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웃으며 넘기기엔, 그 한마디가 너무 정확했다. 그건 말이 아니라 칼날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식사는 끝났고, 그들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퇴근 시간, 하린은 먼저 자리를 정리했다. 책상 위에 놓인 문서를 차곡차곡 쌓았고, 물 잔을 비웠으며, 메신저 로그를 비워두었다. 오늘 하루 동안 준과 나눈 대화는 단 한 줄이었다. “3시 회의 준비되셨나요?” “네, 곧 드릴게요.” 그 두 문장이, 그날 하루의 전부였다. 그녀는 그 짧은 문장들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감정은 그 사이에서 끝없이 말하고 있었다.
준은 그녀가 떠나는 걸 보았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린이 말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요.” 그 짧은 인사가 모든 걸 품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걸었고, 준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하루. 다시 일상으로 흘러가는 밤.
그리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