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그는 평소처럼 커피를 들고 있었다. 날이 좋아서 도산공원을 한 바퀴 걷고, 회사로 돌아가려던 길이었다. 늦가을의 오후, 햇빛이 길게 드리우고, 바람이 적당히 스치는 날. 횡단보도 앞, 파란불이 깜빡였고, 그는 한 박자 늦게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옆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났다. 낯설지 않았다. 너무 낯설지 않아서 오히려 조심스러운 그 소리. 고개를 돌렸다. 거기, 그녀가 서 있었다. 하린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그리고 아주 작게, 아주 부드럽게—둘은 동시에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하린이 먼저 말했다.
“그러게요.”
준이 답했다.
그 말만으로도, 그 사이의 모든 시간이 스르륵 정리되는 것 같았다. 하린은 손에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고, 그 안에는 아마 커피일지도 모른다. 준은 여전히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고, 종이컵의 표면은 햇빛을 받아 미묘하게 빛났다. 둘은 인사를 나눈 후,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걸었다. 그 짧은 만남은 아무런 약속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시간이 그 자리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준은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때 우리는 정말… 말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 말이 닿을 자리는 이미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걸음을 옮겼고, 계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흘렀다. 다만 그의 마음 한 귀퉁이엔 아직도 지지 않은 계절이, 누군가의 이름을 닮은 채 서서히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