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신뢰 위에 쌓인 관계다. 그 신뢰는 마치 바닷가에서 정성껏 쌓아 올린 모래탑과 같다. 어느 순간엔 그 모래탑이 견고해 보이기도 하고, 끝까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튼튼하게 쌓았다고 해도, 작은 물방울이 스며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그 탑은 무너지고 만다. 사랑 역시 그런 신뢰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녀와 나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해왔다. 처음에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말없이도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나는 그녀를 믿었고, 그녀 역시 나를 믿었다.
그러나, 관계는 언제나 그런 확신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신뢰가 깊어질수록 그것이 무너질 가능성 또한 커진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오해가 생겼다. 별것 아닌 사건이었다. 그녀가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은 것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인데, 그날따라 내 안에서 무언가가 쌓여 있었던 것 같다.
“왜 이제 왔어? 기다렸잖아.”
내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도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 짧은 순간, 우리의 신뢰는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변명했다.
“길이 막혀서… 미리 연락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꺼졌어.”
사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 이미 의심이라는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처음엔 작은 물결이었다. 그런데 그 물결은 차츰 거세져 모래탑을 잠식해 갔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엔 작은 틈이 생겼다. 그녀가 한 번 더 늦거나, 연락이 조금만 더 늦어도 나는 자꾸만 의심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도, 그녀도 서로의 눈을 피하며 그 간극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이 괜찮다고 믿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이미 거짓말처럼 신뢰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날 의심해?” 그녀는 어느 날 차분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 의심하는지, 나도 모르겠었다. 그저, 한 번 생긴 균열이 점점 커져 갈 뿐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자꾸 멀어져 가는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도 느끼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것 같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깨진 마음의 파편들을 다시 붙일 수 없다는 걸. 결국 우리는 그 모래탑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았어. 우리…”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미 무너진 탑을 다시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오해에서 시작된 우리의 관계는 점차 커다란 허물로 무너졌다. 한 번 균열이 생기면 그것은 결국엔 도미노처럼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만다. 아무리 애써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신뢰의 무너짐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사실 난 변한 게 없었어. 하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게 진짜 변한 거겠지.”
그녀의 말처럼, 사실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그녀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한 번 스며든 의심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었다. 사랑이란 그저 한 사람만의 마음으로는 지킬 수 없는 것임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함께 쌓았던 모래탑이 결국 그렇게 흩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작은 파도가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우리는 너무 늦게 알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