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게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흐려지면서도 선명해진다는 게.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내 삶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게.
그날 우리는 가을빛이 퍼지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발밑에서 들릴 때마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감탄사를 흘렸다. 문득 그녀가 내 어깨를 톡 치며 말했다.
“너는 왜 항상 이렇게 덤덤해? 뭔가 생각이 있어 보여도, 보여주지는 않잖아.”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내 미소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가끔 너를 볼 때면 넓은 호수 같은 기분이 들어. 고요하게, 잔잔하게, 하지만 깊은 물아래 뭔가 감춰져 있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와 함께 이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게 좋았다.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알았다. 언젠가 이 길을 나 혼자 걷게 될 때, 그녀의 말들이 이 거리 위에 조용히 깔려있을 것이라고.
며칠 뒤,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우리는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문에 빗물이 맺히며 바깥 풍경을 일그러뜨릴 때마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말했다.
“너랑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아. 근데, 언젠가는 다시 흘러가겠지?”
나는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만 ‘언젠가는’을 되뇌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불안이 스며드는 것 같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걸 애써 묻어두고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이 자장가처럼 그 순간을 감싸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조용히 내 곁에서 떠났다. 예고도 없이, 이별의 말도 없이. 그날 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응답은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내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덤덤한 내 모습이 답답했을까. 모든 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와의 순간들이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조금씩 빛바래 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와 나눈 대화들, 그 짧은 웃음들, 말없이 마주하던 순간들은 점점 선명해졌다. 기억 속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은 어딘가 깊이 새겨져 있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 선명하게 떠오르곤 했다. 특히 마지막으로 그녀가 말하던 그 말.
“시간은 멈춘 것 같아. 그런데 다시 흘러가겠지?”
이제는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것 같다. 내가 덤덤한 척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내 안에서 작은 파문을 남기며, 잔잔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나를 흔들고 있었다. 그 흔들림이 가라앉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