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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지지 않는

_어떤 계약직

by somehow

직업 혹은 작업에 익숙해지는 데는 당연히 자연적으로 쌓여가는 시간뿐 아니라, 그 자신의 의지나 노력의 정도 외에도 자격의 차이가 있는 것같다.



내가 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한지 두달 여가 되어가는 지금, 같은 현장에는 유일한 남자 계약직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처음에는 알바라고 불리기에 그런가 했는데, 알고 보니 계약직이라고 한다.

그는 전무님의 지인이며 짐작컨대, 현직 은퇴 후 일자리 제공 차원에서 전무인 친구의 배려로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 같다. 그는 60세 정도이며 우리 생산직 주부들이 일하는 현장에서 일손을 보태어 도와주는 일을 한다.

그러다 가끔 개인적인 일이 있을 때는 자유롭게 결근도 하며, 이를 테면 아직 젊은 나이에 은퇴하여 집에서 놀기는 뭐하고 몹시 힘든 일도 없는 이곳에서 하루종일 운동삼아 적당히 움직이며, 최저시급정도의 적당한 급여를 받으니 꿩먹고 알먹고식으로 근무하는 듯하다.


엊그제도 그와 함께 일을 했다.


그의 작업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정규직과 계약직의 일에 대한 태도 혹은 적응성이 다를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하고 쉬운 일이어서 지루할 수도 있으나, 시간이 쌓이는 만큼 점점 속도를 높일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지기도 쉬운 작업이었다. 바로, 비타민 500정이 들어가는 커다란 통의 뚜껑에 라벨스티커를 붙이는 작업과 그 스티커를 붙인 뚜껑의 안쪽에 이너씰을 한 장씩 넣어 다른 수납박스에 옮겨 차곡차곡 쌓는 일이다. 이렇게 밑작업으로 뚜껑 하나를 만드는데 최소 두 명이 필요하다. 그로써 본작업이 용이하도록 하는 것이다. 두가지 다 매우 단순하고 쉽다.

상황에 따라 스티커를 붙이거나 이너씰을 넣거나 하면서 작업자 둘이 손을 맞추면 된다.

아무리 서투른 사람도 몇날, 몇 번씩만 해보면 저절로 속도가 붙게 마련이다.

아직 초보인 나조차도 그 계약직아저씨와 그 작업에 대한 경험이 비슷한데, 몇 번째 함께 작업을 하게 된 엊그제 문득, 그의 작업속도가 처음이나 지금이나 전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왜지? 도대체 저 아저씨는 왜 저렇게 작업속도에 변함이 없을까? 의문을 갖고 지켜보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뚜껑에 스티커 붙이는 일만을 고집하기도 했다. 안쪽에 이너씰을 넣는 작업이 좀더 힘들다며.

그러다보니 함께 짝을 이루어 일하는 사람이 불편했다. 스티커 붙이는 동일한 작업을 함께 무한반복하는 우리들은 저절로 속도가 붙어가는데 그는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것처럼 처음그대로의 어설프고 더듬거리는 속도를 성실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누구나 금세 익숙해질 수있는 단순작업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은, 어쩌면 계약직과 정규직의 차이일까?

게다가 저 계약직은 전무라는 막강하고 믿음직한 친구의 빽을 등에 지고 있기 때문일까... 그런데 아무리 계약직이라도 지난해 6개월간 일했던 마스크공장에서도 나와 동료들은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절로 익숙해졌을뿐 아니라 모두들 작업에도 가속도가 붙었는데, 동료들의 속도가 높아질수록 그들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은연중 각자 스스로 분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원칙을 지금 저 전무 빽을 짊어진 계약직 아저씨는 완전 무시한 채 자신만의 느긋한 속도로 작업을 즐기는 듯 보이기까지 하니 참 의아했다. 그뿐아니라 그는 작업장으로 들어오는 시간도 늘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원칙적으로는 오전 8시반이 작업 시작이나 보통 20분이면 작업장에 모여 간단한 체조를 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우리 정규직들은 시간을 칼같이 지킨다.

그러나 그는 체조가 다 끝나갈 무렵 어슬렁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선다. 마치 작업시작 시간을 몰랐다는 듯이. 또 중간 10분 휴식 이후에도 단 한번도 정확히 작업시작 시간에 맞춰 돌아온 적이 없다. 항상 10분후에 정확히 작업장으로들어서는 우리들과 달리, 그냥 대충 10여 분정도 후에 돌아 오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왜 그럴까. 나는 생각했다.
그는 결코 매일매일의 우리가 성실하게 해내는 작업들이
참 대수롭지 않은가 보다.
자신은 계약직이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하루이틀 결근도 할 수 있고 아무 때나 그만둘 수도
있는 자유로운 영혼인지라,
결코 이런 따위 일에는
익숙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인가 보다.

그저, 은퇴 후 일정하게 할 일도 없으니 하루하루를 소일 삼아 때우고
적당한 급여로 용돈벌이나 하는 것으로 무척 만족스러운가 보다.

종종 작업장으로 들어와
우리의 일을 도와주는
전무-자신의 친구-를 만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여유있고
반가운 표정까지 보이며.

또 한번은, 지난주의 어느날 갑자기 그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우리 모두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왜 그런가 알고 보니, 경위는 이랬다.

맨처음 우리 작업현장에서 그에게 우리가 요구한 작업은 매우 단순하고 쉬운 일이었다.

50정 혹은 500정씩 포장하는 자동포장기에 필러실에서 1차로 내포장되어 벌크상태로 묶여 옮겨진 수만 개의 비타민을 자동포장기에 쏟아붓는 일이다.

그렇게 작업시작에서 끝날 때까지 무한반복으로 쏟아 넣으면 기계에서 자동으로 분배되어 자동포장기로 이동되고 비닐팩에 50개씩 담겨나오거나, 500개씩 큰통으로 받아내(작업자가) 것이다.


그 일은 정말 단순해서 나역시 처음 들어오자마자 했던 일이다.

처음에는 너무 지루하고 몸이 찌뿌둥하지만 그 현장에서 가장 속편하고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분명했다. 바로, 그렇게 그 일을 몇날몇일 하다 보니 그는 지루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 무거운 박스를 들어 옮기는 일을 돕겠다고 자청해 나섰던 것이다. 덕분에 비타민 50정짜리 비닐팩 10개씩×10박스들이 혹은 500정짜리 통×16개들이 박스를 포장하고 옮기는 등 다소 버거운 일을 거들어 주기 시작하자 한동안 우리 주부들은 조금 편해졌다.

그렇게, 처음엔 스스로 이리저리 다니며 무거운 박스를 팔레트 위로 쌓아올리는 일을 도맡곤 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남자로서 여자들이 무거운 박스를 들어 팔레트에 몇 단씩 쌓는 것이 안 돼보였던가 보다.

그것이 자연스레 자신의 일이 되자 이후로 1~2주 정도 그 일을 도맡게 되었고 우리 모두 그에게 고마웠다. 알아서 도와주시니 감사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가 타정실로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조금 황당했다.
스스로 도와주기 시작했던
일이 힘들게 느껴지자
힘든 일은 더 이상 못하겠다며,
좀더 쉬운 일을 하겠다며 가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그 일도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는지
그 며칠만에 또다시 우리 작업장으로 은근슬쩍 돌아오기 시작했고,
바로 500정 생산을 위한 밑작업인 뚜껑 스티커 작업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의 오락가락을 보며 나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일을 골라서 하겠다'는 저 사람의 자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게 바로 정규직과 계약직의 차이일까, 아니면 단순히 개인적인 성향의 차이일까.

어쩌면, 자신은 평생 화이트칼라로 일했기에 늘그막에야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생산직의 육체노동 따위는 서투르고 어설퍼서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높이 사는 것일까.


보통의 알바나 계약직은 시키는 일을 묵묵히 잘 해내려 애쓰는게 본성이 아니던가.

나의 경우로만 비추어 보아도 그렇다. 조금이라도 열심히 빨리 적응하여 인정받고 가능하면 오래 일하고자 하는...그 모든 선입견을 타파하는 그의 작업관 혹은 직업관나로서는 참 낯설기만 할 뿐이다.


현장 작업은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 종합 포장 작업이나 타정작업, 어느 한가지에도 결코 익숙해질 생각은 애초에 없는 모양이다.

절박할 것도 하나 없는, 그저편한 계약직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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