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Oh My Lif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mehow Feb 28. 2023

취업 혹은 퇴사, 그리고 이직

_최선의 정박지碇泊地를 찾아서

면접시, 사장님의 인상과 자상한 말투와 상대를 존중하는 듯한 태도 등 여러면에서 꼭 채용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N화장품회사에서의 일주일 아니 정확히 따지면 6일간의 근무는 다시 한번 나를 시험하는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생산현장 외의 조건이 마음에 끌려 취업을 소망하기도 드문일인듯 한데, 막상 하루종일 내가 부딪혀야 하는 현장의 작업자들과 작업방식은 상대적으로 최악이었으니 말이다.

기쁘게 출근한 당일에 혀를 내두를정도의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당장 도망치고 싶은 현장으로 느껴지기는 지난번에도 딱 하루만에 탈출했던 화장솔제조공장과 막상막하가 아닌가. 그나마 화장솔제조공장은 이토록 신체일부가 으스러질만큼 고통스러운 노동강도를 요구하지는 않았으니, 노동강도면에서는 역시 최악이라 할만했다.



N화장품회사에 출근했던 첫날(금요일), 뜻밖에도 그 이전 어느날엔가 이력서를 송부해 두었던 업체에서 문자연락이 왔다.

다음주에 면접을 보라는 것이다.

그곳은 화장품 회사의 바로 근처에있는 실리콘 제품생산업체 S였다. 그곳은 예전부터 '주부사원가능'이라는 공고를 믿고 여러 번 지원했음에도 면접통보는 한번도 받은 적이 없던 곳이었다.

이건 또 어쩌자는 거냐...

그래서 면접통보는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첫 날부터 하루종일 샴푸병 뚜껑이나 닫게 하는 이런 중노동을 때려 치워도 될지 모를 훌륭한 대안이 나타난 것만 같아 기대감에 부풀었고 조심스레 회신했다. 월요일 오후에 면접을 보겠다고.


그리고 당일,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S실리콘 본부장이라는 사람과의 면접에 임했다.

면접은 뜻밖에도 1시간 넘게 이어졌고, 그는 처음에 이력서의 사진만 보고(나이가 표기되어 있음에도) 젊어보여서 면접통보를 했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아, 벌써 2년전에 찍은 내 사진에 속아서 연락을 한 것인듯.

어쨌거나 일단 만났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얼마나 어필을 하느냐에 결과가 달린 것이다. 나는 성실하게 면접에 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바심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는, 면접평가표를 옆에 놓고 점수를 매겨가며 조목조목 질문을 해댔다.

생산직 면접에서 그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면접이 진행될수록 면접관은 나에게 점점 호감을 갖는 듯 했다. 일반적인 생산직 주부사원 지원자들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는 나의 이력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나는 성의껏 대답했고 그 점에서 꼭 채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가보다.


아무튼, S실리콘은 최상급 실리콘으로 식품용기를 비롯한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해내는 중소기업이었다.

그곳 생산부는 다양한 팀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실리콘 원료를 섞어 밀가루반죽처럼 제조하는 믹싱팀, 믹싱된 실리콘반죽으로 식품용기를 찍어내는 성형팀, 그 제품들의 불량을 찾아내고 선별하는 사상/검사팀, 포장/조립팀, 물류팀 등등으로 나뉜다. 나는 그중에서 제일 만만해 보이는 사상/검사팀에 지원했다.

일차적으로 대면 면접이 끝난뒤 면접관은 사상/검사팀의 실제 작업현장을 보여주었다.

4~5명의 직원들이 각자의 책상에 앉아 성형팀에서 찍어낸 다양한 실리콘제품들의 불량을 선별하거나 다듬고 있었다.

작은 티끌을 찾아내거나 불완전한 부분을 칼 등의 도구로 다듬기 위해서는 눈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앉아서 일을 한다.


모든 면접이 끝나고 헤어지기 전, 할 수 있겠느냐고 그가 물었다.

일은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고 작업장은 춥지도 않고, 냄새나 소음, 먼지도 없어 보였다.

일단 오케이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나요? 내일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갑자기, 당장, 내일부터라니?

네-? 제가 채용된 건가요?? 그래도 내일부터는 좀....설 지나고 출근하면 안 될까요....

화장품공장도 마무리해야 하고 일단 시간이 필요할 것같았다.

아, 그건 너무 늦고, 그러면 내일 모레부터 출근합시다! 할 수 있죠?!

그가 갑자기 출근을 재촉하니 당황스러웠다. 화장품회사에 뭐라고 말을 하고 때려치우나...아직 대본도 마련하지 못했는데, 갑작스런 출근 요청이라니... 하긴, 첫날 당했던 손가락고문에 질려버렸으니, 언제 또 그 작업을 하게 될지 모르는데...

에라 모르겠다. 나를 이렇게 열렬히 환영하는데 뭘 고민하겠어? 일단 지르고 보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갈 데가 생겼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면서도 당장 내일 그만둔다고 말해야 하니, 그 핑계를 문장으로 완성하는 일이 곤혹스러웠다. 내가 그곳을 떠나려는 이유는 명백하지만 그럼에도 며칠만에 때려치우는 경솔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은 참 원치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도 고민에 휩싸여, 이제 퇴근 이전에 퇴사 결심을 밝히는 일만 남았다고 초조해 할 즈음 S실리콘의 면접관에게서 친히 전화가 왔다.

회사측의 결정사항이라며, 설이후에 출근하는 것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설이후 출근을 원한 것은 나였고 아무리 원하던 새로운 직장에 채용이 확정되었다 한들, 하루이틀만에 이곳을 뛰쳐나가기도 그리 마음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로서는 다행스러웠다.


모든 일이 차례로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화장품회사에 일단 정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설 전까지 일주일여 시간동안 좀더 겪어보며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렇게 화장품회사에서는 2023년 1월13일부터 20일까지 일했다. 실제 근무일수는 6일이다.


이미 떠나기로 중간에 마음을
굳혔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어떻게 퇴사통보를
하느냐의 문제로,
시한폭탄을 안고 지내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럴 때, 19일 목요일에는 느닷없이 배 한 박스를 받았다.

설을 맞아 전직원들에게 하나씩 돌린 것인데, 나는 내일이면 끝낼 사람인데 그것을 받아야할지 말지 몹시 괴로운 상황이 되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상태인지라, 어떤 이유로 그것을 사양할 수도 없었다.

결국 시치미를 때고 천근만근 마음처럼 무거운 배 한 박스를 들고 퇴근했다.

다음날, 화장품 회사의 마지막 근무일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언제 운을 떼느냐만 남았을 때, 점심시간 무렵, 다른 신참 여자애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5만원이 들어왔어요!

알고 보니 그 역시 설을 맞아(상여금도 아니고..아무튼..)회사측에서 입금한 것이다...아, 이게 뭐지... 나는 한없이 난처한 기분이 되었다. 사장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과일이며 상여금(?)이며 아직 계약서도 쓰지 않은 나에게 아낌없이 쓰시는데, 나는 떠날 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점심시간 직후에 나는 오늘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일이며 돈이며...그걸 어떻게 해야 할 지, 먹튀하는 것같아 난처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반장이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그냥 받으세요, 그렇다고 다시 돌려줄 거에요, 어쩔 거에요? 그러니까, 그만둘 거면 미리미리 얘기를 해야지 오늘 그만 두면서 오늘 얘기를 하면 어쩝니까...


그건 백프로 맞는 말이다. 마음의 결정을 빨리빨리 하고 미리미리 통보하는 것이 예의가 맞다.

나는 순전히 교활한 꼼수를 부린게 맞다.

그런 줄도 모르고 기존 직원들과 공평하게 대우해주는 사장님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쯤에서 궁금한게 있었다. 그럴 거면서 왜 처음부터 계약서는 쓰지도 않고 언제 쓰자는 말도 없이 그날까지 지나고 있었는지...하는 것이다. 차라리 진작에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면 그때 미리 도망갈 궁리에 대해 실토했을텐데. 그러니까 나는 계약서도 쓰지 않은 상태에서 6일동안 일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에게 도망갈 생각이면 계약서도 안썼으니 지금이 기회다, 라는 의미로 여겨질 정도였다.



2023년 1월25일.

음력 설이 지나고 드디어 S실리콘에 첫 출근을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로 마지막 정박지가 되기를 바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최악의 생산현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