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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how May 29. 2023

어머니의 외출

_요양원 입소 후 첫나들이

5월 15일 동생과 조카가 2~3주 일정으로 한국에 왔다.

어머니의 요양원 입소 소식을 들은 후, 근황이 궁금하여, 어느덧 대학교 2학년에 다니고있는 아들과 함께 어머니를 뵈러.


그리고 일주일후 어머니의 외출이 실행되었다.

물론 그것은 미국 사는 막내딸이 도착하면 실행하기로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다.


5월21일, 어머니는 2주간의 예정으로 요양원을 벗어났다.

서울에 사는 언니집으로 이동했는데, 시작부터 사실 쉽지 않았다.

허리에 치명적인 통증이 있는 어머니는 오래 앉아있는 것자체가 무리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요양원에서 한달넘게 가료를 했기에 좀 나으려나 싶었던, 딸들의 어리석음때문에 구급차가 아닌 내 차로 모셔가게 된 것이다.


짐을 꾸려 요양원을 출발하여 가는 내내 어머니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최고급 중형차도 아닌 내 작은 승용차는 험악한 도로 상태를 승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 진동은 평범한 이들에게는 별것 아닌지 몰라도, 치명적 허리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구순의 어머니에게는 매순간 엄청난 충격으로 가속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언니집으로 출발하는 즉시, 그러한 사실을 감지했으나 다시 돌이킬 수는 없는 먼 길을 달려야했다.

다행히 일요일 오전이어서 도로가 거의 막히지 않았다는 점을 위안삼아야 할 지경이었다.



우여곡절끝에 도착해서도 빌라 4층에 있는 언니집까지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는일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양쪽에서 이제는 더없이 가뿐해진 어머니를 들어올려 계단을 타기 시작했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조카가 뼈대만 남아버린 외할머니를 들쳐업고 단숨에 4층까지 오르고 나서야 고된 여정은 끝났다.

거기서도 다시 내부에 있는 계단으로 한층을 더 올라야 했으나 그 앞서의 과정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5층에 있는, 언니가 집을 지어 올린지 20여년 만에 최근 대청소와 적당한 리뉴얼을 한 공간에 새로 들인 단단한 침대 위에 어머니가 자리잡고 누웠다.


그로써 끝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어머니의 딸네집 나들이는 더이상 예전과 같은 편안함을 선물하지 못했다.

집을 더 정돈하고 다듬었음에도 홀로 거동자체가 부자유, 불가능한 어머니를 돌보는 것은 당사자는 물론 언니와, 잠시 다니러온 동생에게도 모두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럼에도 꼭 그렇게 해야만 했던 이유는, 그전에 몇 차례 어머니 건강이 나빠질 때면 두어 달씩 정성껏 구완하여 놀랍도록 기력을 회복시키곤 했던 언니 자신의 간절함이 큰 동력이었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어머니를 회복시키리라...


요양원에 들어가신 이후로 거동 자체가 줄어들면서
어머니는 눈에 띄게 앙상해졌다.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노구老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변모했다.
말할 수 없이 안타깝다.

불과 몇년 전까지도 허리통증을 노래하면서도
지팡이를 집고 홀로 거동이 가능하던,
든든한 체구의 어머니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퀭하게 야윈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두 눈 조차, 뻥 뚫린 시선으로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게 느껴진다.
메마른 음성은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새되고 가냘픈 톤으로 변했다.
그 가냘픈 음성 또한 똘똘하던 의사소통 의지를 짐작하기 어려우며,
당신이 내뱉는 소리의 8할이 통증의 호소,
고통스런 비명에 다름 아니다.

아주 가까이 당신 귀에 대고 속삭여야 내 말을 간신히 알아듣는다.

결국, 언니집에 간지 3일만에,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가겠다고 어머니가 스스로 말씀하셨단다.

그러나 3일을 더 어찌어찌 지내던 중 마지막날인 토요일에는 아들네 가족들과 작은 삼촌네 가족들의 방문을 받고 잠깐이나마 생의 의지가 회복되셨던가 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다시 그곳에 더 머물고 싶은 속내를 비치기도 했단다. 그러나, 일가친척들의 방문으로 북적이며 사람사는 것같은 흥겨움은 잠깐일 뿐이라는 점이 현실이 아니던가....

어머니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매일 돌보아야하는 입장의 언니로서는 자신도 이미 안아픈 곳이 없는 70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스스로 거동이 불가한 구순의 노모를 예전처럼 구완하기는 결코 불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득이 일정을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어제 5월28일 일요일에 다시 요양원으로,

처음 예정했던 2주간의 여정을 다 채우지도 못한채 일주일만에 복귀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서운함과 안도가 교차했을 것이다.

좀더 자식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아쉬움과, 그럼에도 어느새 익숙해진 요양원침대와 24시간 돌보아주는 요양보호사들의 보살핌 가운데 조금이라도 통증을 줄일 수 있게 되었음에.


요양원에 어머니를 두고 나오며, 언니가 말했다.


이제는 내 마음에서도 어머니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동안에는 자신이 어머니를 위해 무언가 더 해줄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예전처럼 자신이 고되더라도 어머니를 옆에 끌어앉히고 정성껏 구완하면 다시금 벌떡, 일어설 것만 같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이번의 시도에서 깨달았다.


더이상, 어머니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계시다.

이제는 아무리 해도 회복이 불가능한 정도의 노구가 되었다.

이제는 우리 모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식이라는 천륜의 도리만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어머니는 이르렀다.


어머니를 요양원 침대에 다시 누이고 돌아서는 우리 마음은 서글프고 쓸쓸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가 조금더 편안하게 하루하루를 지내시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가득하다.


로비에서의 마지막 기념사진 후 요양원 침대로 복귀하신 어머니와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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