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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how May 30. 2023

빵공장에서 일합니다

_묵묵한 일상을 꿈꾸며

취업도전기는 자주 쓰는것이 좋을까,아닐까.


당연히

갑과 을의 마음이 딱맞는 일터에서 뭉근하게 오래 일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


프로퇴직러라는 신조어를 처음 본 순간, 뭐지 싶었다.

그들 프로퇴직러님들은 대체로 어딘가로 잘 들어가고 또 잘 튀어나오는가 싶었다.

사실, 프로퇴직러라는 신조어는 내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어느나라 말인가 말이다.


십수 년씩 잘 다니던 직장에서, 스스로 '이제 그만 됐다'싶어 기쁘고 흔쾌하게 사표를 던지고 떠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얼치기 생산직 4년차인 내 경우,

시린 겨울 이른 새벽, 생산직의 망망대해에 조각배 하나 덜렁 띄우고

발목까지 물에 젖어가며 엉거주춤 올라앉은 이후로, 나는 조금이라도 더 흡족한 일터를 찾기 위해 입사와 퇴사를 반복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내 자발적 의사가 90프로였다고 해도 퇴사란, 매순간 그리 흔쾌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나처럼 어떤 우여곡절을 감추고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퇴사를 거듭하는 그들을 일컫는 프로퇴직러라는 표현은, 손끝으로 퉁겨질만큼의 자존심만이라도 어찌 좀, 세워보려 어색하게 옷깃을 추어올리는 제스처의 의태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혹시 미지의 프로 퇴직러들의 귀에 이따위 허접한 표현이 떠돈다는 소문이 들어가더라도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단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잡썰일 뿐이므로.


어느덧 이번 취업도전기간에도 나는 수없는 고민과 숙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언뜻, 돈만 많이 주면, 일만 쉬우면 덥석 먹이를 무는 습관이 있는것 아니냐는 오해를 할 수도 있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이 사실이다.

돈을 많이 준다는 곳을 가보면 일이 고되고, 일이 쉬우면 급여가 달랑 최저시급에 그친다.


나의 고려사항뿐 아니라, 구인공고를 낸 사업주의 고려사항도 때로는 나의 결격사유가 된다.

한번은 누룽지를 생산하는 곳에 전화를 걸었다.

그곳에서 할 일은 생산된 누룽지를 소분하고 포장하는 일이라고 했다.

쉽겠네 싶었다. 그럼 최저시급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면접 좀 보자고...

그런데, 거기서 대뜸 나이부터 물었다.

만 56셉니다. 내가 가능한 밝고 젊고 당당한 음성으로 답변했다.

그러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되겠다고 칼처럼 자른다.

즉각적으로 언짢았으나 감정을 감추고 물었다.

아, 그러시냐, 나이가 얼마면 되냐? 했더니, 50대초반 정도까지만 쓰려고 한단다.


소분이나 포장 등 지극히 단순한 일을 시킬건데, 아직 노동능력과 의사가 이토록 짱짱한 만56세는 뭐가 못미더워서 뺀찌를 놓는가 말이다.

아, 알았다고, 역시 나이가 많아서 안되는구나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다음으로는 물티슈공장이었다.

그곳은 일 자체가 무겁고 고되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아예 생각도 않고 있었던 업종이다.

그런데 워크넷 상담사가 자꾸만 그곳을 들먹이길래 혹시나 하고 전화를 또 돌려봤다.

그랬더니 거기서도 나이부터 따졌다.

내 나이 듣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무 많아서 안돼요!한다.

와보라고, 면접이나 한번 보자고 해도 갈까말까인데, 그쪽에서 먼저 알아서 끊어주니 두 번 다시 미련을 갖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물론, 이들 업체들과의 접속을 시도한 것도 빵공장_H에의 입사가 결정된 이후이기는 하다.

출근전까지 며칠 여유을 둔 이유가 뭔가 좀더 다른, 좀더 내 마음에 쏘옥 들, 아직 미지의 영역에 내 일터가 남겨져 있지는 않을까하는 미련을 해소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기를 써가며 탐색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다 나가리였다.


마침내, 나는 5월 4일부터 인연이라면 끈끈한 인연이 닿은 빵공장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어느새 한달이 되어간다.



빵공장_H

이곳은 수년전 일산에 생긴 어느 빵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적어도 7년 정도는 되었다고 한다.

그즈음, 일산에 사는 빵좀 씹는다는 주부들의 입으로 빵집_H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가보다 했다.

빵을 절대 싫어하지 않으나 한입 씹어 삼키는 순간부터 뱃속에 가스가 차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빵집이 유명세를 타면서 빵집 뒤켠 주방에서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는 수요에 부응하기 어려워졌던가 보다. 그로부터 대량생산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베이커리 팩토리로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현재의 위치로 공장을 이전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이 빵 공장의 생산팀에 지원했었다가 결핵감염으로 포기했었고 올해 실리콘공장에서 탈출한 뒤 마침 뜬 포장직 구인공고를 발견하고 이력서를 투척한 결과, 오늘에 이른것이다.

근무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5시.


집에서 30여분남짓 달려야 하지만, 마음에 든다.

첫번째 이유는 사람들이다.

반장과 7~8명정도의 부원들, 실리콘공장이나 그 앞서의 화장품공장같은 밑도끝도없이 야릇한 경계심이나 위화감은 처음부터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보는내게 모두들 친절했다.

처음 온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하려는 배려심이 엿보였다.

시간제근무를 하는 아르바이트직원도 있고 나같은 정규직도 있다.

연령대는 30대 후반에서 66세까지도 있다. 여기서 나는 일하기 적당한 나이에 속한다.


다음은 이다.

생산팀이 윗층에서 생산해 내려 보내는 빵들을 얄팍한 비닐봉투에 잽싸게 넣는 일이 전부다.

가끔 그것들을 실링하기도하는데,  쏟아져나오는대로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쌓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포장실의 일은 팀원 모두가, 함께, 나누어 하는 것이다.


물론, 5월 15일까지 기간은 대목이라 엄청 바빴다.

그래서 물량 자체가 많아서 힘들기는 했으나, 바쁜 시기가 지난 지금은 물량도 적당하고 일의 속도도 빠르지 않다.

실리콘공장에서 큰 부상을 입었던 손가락의 관절과 어깨관절의 통증도 놀랍게도 거의 다 사라졌다.

그때는 밤마나 퉁퉁 부은 손의 통증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는데, 그런 일은 없다.

딱하나 힘들다면, 냉동고에 드나들어야 하는것이다.

공장이다 보니, 매일 생산된 빵이 출고되기도 하지만 생산 즉시 급랭되었다가 출고전 포장하여 내보내는 경우도 있어서 냉동고가 필수시설이다.

그곳에 가끔 드나들어야 할때가 힘들지만 그정도는 견디어 볼 생각이다. 남들도 하는데.


나에게 이곳은 이제까지 겪어본 중에 꿈의 일터라고 할 만하다.


그뿐아니라 급여도 최저시급보다 조금더 높다. 최저급여만 준다고해도 이정도 쉬운 일이면 두말없이 할텐데, 처음부터 돈도 더 준다니 땡큐가 아닐 수 없지 않는가.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달콤한 빵냄새를 맡으며 빵을 포장하며 오랫동안 출퇴근을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퇴근후에는 이제 곧 다시 수영장에도 갈 수 있을 것같다.


그저그런 묵묵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더이상 취업도전기를 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정면건물이 사무동, 우측건물이 생산동이다. 1층이 포장부 윗층이 생산팀이다.

ㅡㅡㅡㅡㅡ

앗차 빼먹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의 큰 그림.

빵을 맘껏 먹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헛된 물거품이 되었다는사실.

이곳은 불량품을 바로 폐기한다.

맛도 볼 수 없다.

직원들도 빵집 가서 사먹어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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