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한한 외길은 끊임없는 갈림길
문을 열면 아이는 털을 바짝 세운다.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오히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가만히 나를 보고, 또 문 너머를 바라본다. 그러면 문을 열어둔 채로 잠시 아이의 행동을 지켜본다. 나는 기대한다. 그러니까 아이가 도망치길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달려들길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시선은 연설가의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시선과 시도는 중립적이다. 과연 아이의 어떤 반응도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엔 충분하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대로다. 문밖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 아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결국 문밖으로 나서며 쥐고 있던 문고리를 놓는다. 무거운 문이 닫히고, 곧바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괴로운 울음소리만이 두꺼운 벽을 넘어서 복도 전체에 울리는 것이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 부끄러워 도망치지도 못한 게 억울한 걸까. 두려워 내달리지 못한 게 후회되는 걸까. 글쎄 도망이란 것도 해보지 못했다고 후회될까. 열린 문을 보고 그 너머의 길을 등 뒤로 한 채 되돌아가지 못한 것도 과연 후회될까.
내가 세워둔 계획에 따르면, 3월 즈음 나는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지금쯤은 일도 적응이 되어 성실히 출근해야 했고, 퇴근해선 꾸준히 글을 써야 했다. 하지만 나는 3월에 세워둔 ‘취업’이라는 표지판을 무심하리만치 가뿐히 지나쳤고, 5월이 절반이 지난 지금까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얼마 남지 않은 통장 잔액을 확인한다. 이불속에서 당장 오늘 하루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한다. 이럴 때마다 지난날에 헤어진 그녀가 떠오른다. 솔직히 자랑할만한 처지는 아니잖아, 너. 하고 말을 건넨 그녀는 용감하게 뒤돌아섰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돌아볼 뿐이었다. 뭐 실제로는 전화기 너머로 통화를 하고 있었으니 진짜 뒤돌아섰다는 건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다 말이. 나 역시 정말 문 앞에 서 있던 건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어쨌든 그때 그녀가 도망쳐줘서 참 고맙다. 한없이 옹색해지는 지금의 모습은 아무래도 절대 보여줄 수 없다고, 어질러진 이불속에서 생각한다.
고작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10만 1080원을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5월은 열흘하고 나흘이 더 남았고, 나누면 7,220원이고 매일 세 끼를 7,220원으로 해결해야 한다. 한 끼는 거르고 두 끼만 해결한다고 하면 3,610원씩. 삼각김밥과 라면이면 얼추 맞는다. 그렇게 14일을 버티면 된다. 아이의 사료도 얼추 한 달치는 남았고, 모래도 두 봉지는 남았으니 2주는 버틸 수 있다. 별다른 약속만 잡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6월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작년에 일하던 감리단에서 전무님이 앞으로 2년은 더 같이 하자는 말을 그녀에게 전한 적 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간단한 일로 생활비를 벌면 앞으로 다른 고민 없이 글만 쓸 수 있으니 나로선 퍽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날 선 목소리로 그 일은 그만 하라고 말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런 일이나 하면서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녀의 요지였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그녀도 처음엔 나의 초라함이 낭만으로 느껴지고, 그런 와중에도 고집스럽게 무언가를 하는 모습이 퍽 멋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라한데도 고집을 피우는 꼴을, 가끔 칭얼대는 꼴을 그녀는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치켜세워주던 이가 어느 순간 나를 부끄러워하던 그 장면은 아직도 불현듯 나를 무너뜨린다.
결국 그 일은 그만뒀지만, 그렇다고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현재의 나는 아르바이트마저 떨어지는 실정이다. 이런 나를 보면 아마도 그녀는 생각할 것이다. 역시 저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하지만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나 역시 알고 있었다.(사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나는 선방하고 있다.) 다만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되돌아 갔으니 아주 가끔씩 이렇게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실로 외길이란 역시 갈림길의 다른 말임을 매일 또 깨닫는다. 내밟는 길과 되돌아 걷는 길의 연속이다. 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나는 갈림길을 마주 한다. 돌아설 것인지, 또 한 걸음을 내디딜 것인지. 다신 돌아가지 않겠다 머리를 밀고, 얼굴에 문신했던 어느 날의 누군가만큼 용감하지 못한 나는 매일 문밖을 응시하듯 통장 잔액을 바라본다. 꼭 도망가고 싶은 사람처럼. 하지만 역시 이럴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진호 씨 그건 그냥 외로워서 그런 거예요.
Y는 이어서 말했다.
그건 그냥 분리불안이에요. 자주 놀아주고 그래요.
그건 단지 외로워서구나.
나는 이어서 생각한다.
단지 외로워서 그런 거라. 용기니 도망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외로워서라. 나는 웃음기를 상실한 채 더욱 망연히 생각한다. 단지 외로워서라.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