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서 만나고, 미워도 끊지 못하고, 어리석게 기대하고
늦은 시간 냉면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A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이내 B가 오고 자리에 앉자 둘은 중얼거리듯 무어라 이야기했고, 내 귀에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한 것은 A의 말이었다.
아, 네가 좀 해줘.
그러자 B는 한심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야 너 애야?
그 말에 A는 결국 울컥 목소리를 높였다.
B 그 녀석이 평생 남자들 무리에만 있다 보니 너가 보기엔 기민하지 못해 보일 법도 하지. 나는 일전에 A의 서운함을 남몰래 들은 적 있다. A가 면접을 준비하는 회사에 B의 지인이 있었고, B가 A에게 지인을 소개해준 모양이었다. 그 과정에서 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A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꺼내놓지는 않았으나 보아하니 A는 풀리지 않는 불만이 안에 꿈틀대는 모습이었고, 그를 통해 전해 들은 B는 그런 A의 모습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대강 A는 B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고 B는 A의 바람과 달리 무심한 형국이었다. 나는 역시 B가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단성[單性] 학교를 나와 공대에 진학했으니 공학이며 교회며 남녀가 섞여 지내온 A가 보기엔 서툴러 보일 법도 하겠다고, 대강 A를 위로했다.
그러니까. 눈치가 없어 애가.
어쨌든 시비를 가리기 전에 문화가 다른 것이 원인이 아니겠냐 말한 것이었지만 A는 역시 답답한 자신을 정당화해주는 말로 이해한 듯싶었다. 하지만 A든 B든 사람이 모난 인물이 아니었기에 딱히 내가 나서서 중재하려 들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셋 중에 가장 모난 것은 바로 나였다. A와 함께 보낸 중학생 시절에도 나는 딱히 좋은 학생은 못되었다. 역시 B와 함께 보낸 고등학생 시절에도 나는 딱히 좋은 친구는 아니었다. 어쨌든 고집부릴 사람도 아니고, 다툴 성질도 없는 살가운 둘이니 나는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셋이 함께 앉은자리에서 A와 B는 서로 싱거운 짜증을 부리더니 결국 언성을 높였다.
나는 공연히 웃으며 무슨 일이냐 물었다. 그러자 이야기를 설명한 건 억울한 A가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B였다. 이야기는 이렇다. 이야기랄 것도 못되지만, A와 B의 지인과의 대화가 끝나고, 셋이 한번 보자는 말을 누가 하냐는 것이었다. A는 어색한 자신을 대신해 B가 해주는 것이 응당 맞다고 말하는 것이었고, B는 A가 해도 상관없지 않냐는 입장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B는 A가 해야 한다는 생각도 아니었고, 애당초 그런 걸 따지는 A가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B의 설명이 꼭 틀린 거라고 말할 수도 없었는지 A는 무언가 울컥하지만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B를 바라보았다.
뭐 어색할 순 있지만, A가 하는 게 더 가까워지겠네. 허세 좀 부려, 기다리라고. 회사 붙어서 산다고. 하고 말하자 A는 그럴까, 하고 맥없이 말끝을 흐렸다. B는 입을 다문 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보통 나는 싸우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보통 싸움을 피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싸울 만한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싸울 만한 곳에도 가지 않는다. 언젠가 용산역 CGV에서 커플티를 벗어 그 시절 여자친구의 얼굴에 집어 던진 적 있다. 사람들이 동그랗게 둘러싸자 당황한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으며 그만해라 목소리 낮추라 말했지만, 명령조로 말하지 말라며 나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그녀는 그런 나를 위협적이라 느끼긴커녕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신경은 온통 자신을 지켜보는 군중들에게 쏠려 있었다.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힐난하던 그녀는 정적이 흐르는 군중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미웠다.
그래 알았어. 미안하니까 그만해 제발.
꺼져. 상황을 무마하려는 그녀에게 결국 나는 웃옷을 벗어 던졌다.
팔짱을 끼고 벗은 몸을 가린 채 걸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잘못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역시 그런 상황과 관계는 애당초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외로워서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외로워서 만나고, 미워도 끊지 못하고, 어리석게 기대하고 결국엔 다투는 거라고. 결국은 자기가 외로워서 그런 거면서. 아무렴, 외롭고 말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도 관계도 모두 피한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A는 친구들에게 아쉬운 것을 토로했다. 이를테면, 제 딴엔 노력했지만, 애초에 자신이 원하지 않은 정도의 무엇을 요구하는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 그들은 풀리지 않는 불만이 안에 꿈틀대는 모습이었고, A는 그들과 달리 무심했다. 대강 그들이 A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고 A는 그들의 바람과 달리 무심한 형국이었다. A와 B의 모습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A는 마냥 무심했다기보단 그들에게 맞추기 위해 어느 정도 노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A는 마냥 자신만 예민한 사람인 것도 아니고, 또 누군가처럼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맞춰주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도 아니라고. 그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여유로운 투로 말하기 시작한 그였지만 어느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울분을 토해낸 그는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을 피하는 게 최선이야 역시, 하고 나는 말했다. A 보닛 너머 차갑게 식은 도로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그건 외롭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집에 돌아오자 순덕이는 현관문 앞에 바짝 붙어서는 이미 예상한 듯 나의 얼굴 높이까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아이 앞에서 발을 살살 휘저으며 아이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순덕이는 얼른 도망가서는 냉장고 앞에서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울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울고, 샤워하고 나와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도 울었다. 녀석은 뭐가 억울한지 쉬지도 않고 울었다. 나는 아이의 노란 눈동자를 바라봤다. 살며시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다시 울었다.
휴 이 녀석도 피해야 하나.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