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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호 Jun 02. 2021

XXXI

오히려 좋아



    1.

     한동안 돈이 없어 궁하게 지내던 차에 몇 개월간 넣지 못하던 적금 만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단 문자가 왔다. 보통 같았으면 만기 해지 예정 문자를 보고도 얼마간 까먹고 지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만기일을 머리맡 달력에 적어두었다. 사실 문자를 받은 순간부터 만기일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에 달력에 적어두는 일은 공연한 짓에 불과했다. 순덕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간식을 먹을 때가 됐다며 울어댔다. 그간 간식 하나 주면서 매번 아이에게 눈치를 준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일 아침에 하나씩은 챙겨 주겠다고. 그것도 내가 약속한 거였는데. 아침마다 기다렸단 듯이 먼저 일어나 우는 아이가 옹색한 마음에 미웠었다. 뭐 맡겨 뒀냐 나한테? 어쩌면 울컥한 마음에 모진 말도 뱉었으리라. 역시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이라고, 나 같은 범인(凡人)은 선비는 못될 성싶다고 스스로 꾸짖었다. 부끄러운 마음도 일고, 또 그런대로 뉘우치는 마음도 일어 얼른 몸을 일으켜 서랍 속 남은 2팩의 간식 중 하나를 꺼내 그릇에 짜주었다. 간식이 나오는 걸 보면서 순덕이는 입맛을 다셨다.          



    2.

     바로 적금 만기일 당일, 나는 S를 만났다.

     그녀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자면 나와 나이가 같고, 우린 종종 만나서 술을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어떤 일이 있어서 만나기도 하지만, 어떤 일이 없어도 만난다. 그녀와 나의 교집합을 따지는 건 딱히 의미가 없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교집합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인연의 값을 매기는 짓을 나는 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언젠가 새로 산 내 초록색 신발이 잘 어울린다고 말을 건넸고, 그것을 계기로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게 전부다. 가끔 안주 삼아 이야기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녀와 내가 얼마나 비슷한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고, 혹은 얼마나 다른 기질의 인물됨을 가졌는지 따지는 건 실상 전혀 쓸모가 없다. 만남의 계기에 관하여. 그리고 관계의 당위성에 대하여 나는 사사로이 연연하고 싶지 않다. 누굴 어떻게 만났든 간에 딱히 운명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래도 친구잖아 하는 구질구질하게 인연을 끊지 못하게 만드는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오고 가는 것에 대한 착각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없다.

     어쨌든 S와 역시 가끔 만나고 술을 마실 뿐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친구이기 때문에 만난다. 아니, 친구니까 만나야 한다는 식의 의식이 전혀 없이 술을 마시고 싶을 땐 가끔 서로를 찾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그날 나는 은행에 먼저 들렸다. 기다렸던 일을 마치고 은행에서 나오자, 오랜만에 맛보는 넉넉한 여유로움이 그간 어질러져 있던 마음을 깔끔하게 쓸어내렸다.

     약속했던 시간에 S를 만났고, 홍대입구역에서 상수역까지 걸어, 어느 한 골목길에 있는 어두운 조명의 일식을 파는 주점에 갔다. 메뉴판에 쓰여 있는 가격이 싸지 않아 적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날에 이렇게 소인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속으로 얼마든지 내가 사겠단 마음을 먹고는 더는 가격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봤자 평소보다 몇만 원 더 비쌀 뿐이었지만, 가난한 소인배에게 그런 배짱은 역시 적금 만기일에나 할 수 있는 짓이었다.



    3.

     그날의 대화 역시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역시 적금 만기일에나 할 수 있는 여유를 부린 것이다. 뭐랄까 내가 보는 S는 기분 나쁜 일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렇다고 유난스럽게 걱정이 많다거나 억울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살면서 으레 걱정할 만한 것을 걱정하고, 억울할 만한 것을 억울해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는 걱정과 억울함을 말로 꺼내놓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기분 좋은 일을 이야기하는 경우와 비교해도 기분 나쁜 일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욱 많았다. 그러니 듣고 있으면 그럴 법도 하지 싶다가도, 이야기가 한결같이 안 좋은 쪽을 기대하게 하고, 또 그렇게 흘러가니 그대로 마음을 두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퍽 안 좋아지고 번민에 휩싸였다. 과연 이런 마음을 가지고 견뎌내며 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종종 들기도 했다. 고백건대, 아무래도 나 역시 마음을 다잡기 힘든 시기엔 되도록 S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 노력한 적도 있다. 틀린 말도 아닌 것이 계속해서 나쁜 쪽으로만 길을 트니 말이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닌 것이 계속해서 좋은 쪽으로만 길을 틀려고 퍽 노력하곤 했다. 그건 이제 습관이 되어 어쩔 땐 역시 기분 나쁜 일이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무의식적으로 오히려 좋아, 하고 좋게 생각하자며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억지스러운 궤변을 늘어놓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는 정말로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는 상태였다.

     얼마 전 돌연 회사를 관두고 아나운서를 준비한다던 S는 몇 가지 이유로 반년도 채 안 돼서 그 목표를 포기하였다. 길을 걷던 중 단단하고 차가운 벽을 마주한 그녀는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조급한 그녀에게 술을 따라주며, 나는 있는 힘껏 그녀의 이야기에 맞장구쳤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주를 한 병 비우고 나니, 8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차에 나는 도로 건너편에 있는 LP 바를 가자고 했다. 그녀를 데리고 들어간 LP 바엔 하드록이 시끄럽게 울렸다. 너무 시끄러웠다. 나는 S를 데리고 나왔다.

     한 블록 아래로 내려가자 이번엔 라이브 바가 있었다. 인디밴드들이 공연하는 유명한 곳이라 SNS로 가끔 본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활짝 열린 구조의 가게엔 사람들이 안과 밖의 경계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 너머로 지하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중계하는 영상을 멍하니 바라봤다. S는 영 불안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우리가 건너왔던 도로 건너편의 호프집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자. S는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까이 와서 보니 호프집은 만석이었다. 우리는 호프집을 앞에 두고 위로 올라갈지 아래로 갈지 고민했다. 어디로 갈 거야. S는 퍽 조급한 말투로 물었다. 아래로 가자. 어느새 시간은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는 데리고 호프집 아래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골목엔 이렇다 할 곳이 없었다. S는 이내 실망했다. 어둡고 막막한 길에 마주 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S가 어떤 말이 마음에 생기기 전에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무조건 행복해. 걱정하지 마. 여기서 행복할지 저기서 행복할지만 생각해. 행복을 놓친 게 아닐까 착각하지 마. 어디서든 행복해. 우리는 어디서든 행복해.

     짜증을 삭이려는 얼굴의 S에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데리고 호프집을 지나 그 위로 올라갔다. 그곳은 우리가 처음 있던 바로 그 주점의 골목길로 돌아온 것이었다. 술집이 여럿 보였고, 우리는 뭘 파는 곳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2층에 있는 낡은 가게에 들어갔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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