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근성의 종교학
문득 P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글감을 그리고 있었다. 순덕이는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따르르르. 나는 아주 아름다운 장면을 그린다. 얼마간 아름다움을 음미하기 전에. 묘사는 끝난다. 그건 주인공이 읽는 글이다. 전화가 울린다. 주인공은 지인들을 만난다. 적당히 충분하지만, 어딘가 불안하고 모자란 그들은 주인공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과연 사람을 만나는 게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건, 어떻게 만들지? 어떤 장면으로...... 따르르르....... 일단 사람과 헤어지고 혼자 남은 주인공은. 따르르르! 그러니까 혼자 남아서 바라보는 풍경은, 따르르르! 나는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어 진호 바빠?
아, 그게. 그냥 뭐. 글 쓰고 있죠, 뭐.
아 그래 그럼 혹시 금요일에 몇 시까지 올 수 있어?
그게 세 시 반 예약 아닌가요? 그때까지 갈 수 있어요.
혹시 조금 더 일찍 올 수 있나 하고.
왜요?
너 안경 사주게.
제 안경을요? 괜찮아요. 지금 쓰는 것도 충분히 비싼 거예요.
그거 얼만데. 더 비싼 거 사줄게. 그의 말에 나는 가슴이 턱 막혔다.
괜찮아요. 정말.
정말 안 받아도 돼? 나는 막힌 가슴이 미어졌다.
네 정말 괜찮아요.
말했다 분명히.
그는 그렇게 말하고 알았다, 하고는 차갑게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이야기의 결말을 어떻게 그리고 있었는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은혜를 베풀겠다는 전화 한 통에 나는 무능해졌고, 문득 초라해졌다. 그건 오로지 P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지금 나는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그런 은혜에 유난히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성실히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유난히 이런 은혜로움에 잔인한 자격지심을 가지는 것이다.
아버지를 퍽 아끼는 지인이 여럿 있다. 아버지를 제 사람처럼 아끼는 사람은 꽤 많은데, 누구라 단언할 수 없지만 보통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 얼굴에는 기본적으로 욕심이 바탕이 되고, 그것을 얼추 충족해낸 여유가 기름지게 묻어 있다. 무언가를 숨긴 듯 단단한 피부 거죽을 쓰고 그 거죽을 찢고 드러난 눈동자는 사물과의 완력 싸움을 한다. 어른이 되어 만나는 사내들의 얼굴은 무르익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봐온 아버지는 그들과 달랐다. 때때로 실없이 이죽거리는 것이 한없이 가까운 또래 같기도 했고, 때때로 그치지 않고 소리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폭력과 닮아있었다. 그렇게 변칙적이고 절제되지 않은, 다르게 말하면 가린 것 없이 헐벗은 꼴의, 아버지는 언제나 가진 것이 적었고 무언가에 유난히 심드렁하거나 유난히 분개해하셨다(그런 특징은 아들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주 낡아 거친 아버지의 면도날이 바뀐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삼십 년 가까이 같은 날을 쓰고 있을 리 만무했지만, 이따금 살펴본 새하얗게 낡은 면도날은 언제나 이가 잔뜩 나가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어떤 쓸모가 있었는지, 혹은 어떤 매력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인들은 퍽 아버지를 아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그 지인들 것이 많았다. 안방 공간을 잔뜩 차지하는 침대가 바로 그것이고, 부엌에서 게걸음으로 빠져나와 걷게 만드는 커다란 식탁도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것들은 쉽게도 받았다. 아버지는 딱히 기뻐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퍼 보이지도 않은 얼굴로 뭐 쓸만하겠다 싶으면 흔쾌히 지인들의 은혜를 거리낌 없이 받곤 했다.
한때 은혜받는 것들에 기뻐하던 적이 있다. 어린 시절 나를 좋아하던 녀석이 사주던 아이스크림이나 장난감 따위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준 것도 아니고, 내가 그들에게 어떤 협박을 한 것도 아님에도 더러 녀석들은 내게 밥을 사주고 유희왕 카드를 사주곤 했다. 그건 마치 오롯이 나라는 존재를 위한 공물이고, 찬양이라고. 그 시절 어린 나는 대충 그렇게 느꼈었다. 그런 우월감에서 보면 확실히 녀석들의 선물은 내게 바쳐진 것이었지만, 단지 상황만 놓고 보자면 그건 그저 은혜에 불과했다.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베푸는 은혜. 사춘기 시절, 절대자와의 관계에서도 나는 그러했다. 은혜를 바라고, 은혜를 받게 되면 온 힘 다해 기뻐하겠노라 기도하는 것 말이다. 그야말로 나의 거지 근성은 성스러운 존재에게마저도 향하고 있었다.
그런 과분한 것을 은혜로 받는 것도 나름 능력이라면 능력일 수 있겠지만, 사춘기 시절 마주한 그 물건들에는 아무래도 지울 수 없는 수치스러움이 묻어있다. 무능함과 무책임함의 방증이라고 서럽게 되뇌던 어린 내 기억은 여전히 마음 안에서 나를 울린다.
사실 P의 은혜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가끔 거절하면서도 밥을 얻어먹었고, 공연 티켓을 받았고, 옷을 받았다. 모두 바라던 것들이라고 말할 수 없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거절도 했지만, 그는 내게 성실히 권했다. 많은 것들이 나를 부끄럽게 했지만, 무엇보다 나를 무능하게 만들었던 건 순덕이 간식이었다. 고양이 간식은 언제나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적지 않은 금액을 꾸준하게 사 먹이는 것이, 또는 사 먹이지 못하는 것이 나를 진정 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선물한 간식을 받았을 땐, 나는 거절하지도 못하고 참 서러웠다. 너 선물은 받지 않으니까. 하는 그의 말은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것이었다. 먼저 내게 주는 그의 선물은 받지 않고, 순덕이에게 주는 것은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뜻 사주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받게 될 때. 내가 어쩔 수 없이 고양이 간식을 받을 때, 받는 바로 그 순간 그건 선물이 아니라 설움이 될 거란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 순간 나의 얼굴은 어땠을까. 기뻐 보였을까. 아니면 슬퍼 보였을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