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일기
12시쯤 자리에 누워 라디오 영상을 틀었다. 눈을 감고, 옆에 누운 순덕이를 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한 삼십 분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눈을 번쩍 뜨고 영상을 꺼버렸다.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방에서 다시 눈을 뜬 건 정확히 새벽 세 시였다. 입에 침이 고인 여운이 있는 채로 물을 마시고 싶지 않아 푸른 새벽에 양치했다. 불을 켜지도 않은 화장실에서 나와 페트병 째 물을 마셨다. 순덕이는 어느새 일어나 등을 동그랗게 말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서 나를 정확히 발견하고는 나의 귀에 대고 말하듯 야옹, 하고 울었다. 내 쪽에서는 아이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 흐릿한 검은 형체만 그려질 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긁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다. 떨려서 깼나 싶었는데, 더워서 깬 것이었다. 집은 어느새 눅눅하니 습하고, 기운 빠지게 더웠다.
내일은 작은 회사 면접이 있고, 이렇게 가끔 서울 각지로 면접을 보러 다닌다. 눅눅한 단칸방에서 에어컨을 꺼둔 채 잠을 잔다. 하지만 불안해서인지 답답해서인지 자꾸 잠에서 깬다. 내일 서울은 눅눅할까. 나는 왜 자꾸 불안할까. 에어컨도 켰다 껐다 하는 나 때문에 가끔은 답답할까. 때 이른 새벽에 일어나, 멍청하게 서서는 공연히 잡념에 빠진 나의 정적을 깨뜨린 건 순덕이었다. 검은 형체는 걱정하듯 울음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내려와 개수대 앞에 서 있던 내게 다가왔다. 정강이에 머리를 톡, 부딪히며, 순덕이는 그만 자자고 울었다. 아니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 내가 리본 장난감 사준다고 했었지. 내일은 꼭 사줄게.
순덕이는 발아래에 벌러덩 누워 애교를 부렸다.
나는 작은 섬에서 18년간 살았는데, 대학교 기숙사에도 살고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군 복무를 하기도 했으나 언제나 이 작은 섬에서 살고 있다는 정체성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집 앞에 있는, 학년마다 4개 반이 전부 인, 크지 않은 신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전교 부회장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 남들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헛헛하고, 쓸모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대학교 재학 시절 본 사람들의 모습은 그때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후 중학생일 땐 무리 지어 다니며 초라한 오피스텔에 산다는 이유로 친구를 무리에서 추방하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며 집단이 만드는 폭력적인 민주주의를 목격했고, 그래도 외톨이인 나와 지내는 것보다 잘 나가는 무리와 어울리는 게 좋다, 말하며 다시 녀석들과 어울리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소외된 개인이 느끼는 불안감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 깨달았다. 고등학교 땐 한 선생님과 시험문제로 다툰 적 있는데, 그때 부단히 고민하는 나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이후 보여준 방법과 태도가 지금도 사람 간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방향이 되고 있다. 이런 깨달음엔 거짓이 없다. 그것들이 지금의 나에게 여전히 얼마나 큰 영향력을 주고 있는지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뇨, 잠깐만요. 그건 너무 어릴 때 얘기잖아요.
하지만 대기업 면접에서는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였다. 손바닥을 내게 보이며 말을 자르는 면접관에게 나는 머리가 하얘졌다.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경험 없습니다. 연신 나는 아무런 경험도 없다고 고백하고 면접실을 나와, 나는 단지 내가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닐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그런 곳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고, 시답지 않은 이데아를 그리는 것 같아 금방 관두고 호텔 건물을 나왔다. 그 면접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순덕이를 데려왔으니까. 그게 벌써 1년이 된 기억이다.
그 시절 대기업 건물 앞을 지나니 문득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곳을 지나치니 얼마 안 가 대기업의 그것 못지않게 큰 건물이 새로 나타났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니 층마다 수많은 회사명이 쓰여있는 중소기업 집합소 같은 건물이었다. 거기서 면접을 보기로 한 회사의 로고를 발견하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곳은 공모전과 대학 잡지를 다루는 회사였는데, 공모전 운영과 잡지 제작 업무를 채용하기에 나는 잡지 제작 업무를 지원했다. 그리고 며칠 뒤 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공모전 운영 쪽이 어떠냐고 되레 내게 물었다. 그건 상상해본 적이 없는데…… 아무 말도 못 하고 얼버무리자 일단 면접 시간을 잡고 이야기해보자고 했고, 목요일 오전으로 약속을 잡았다.
실무자로 보이는 남자와 대표로 보이는 여자가 회의실에 들어와 마주 앉았다. 둘은 역시 내게 공모전 운영 업무를 맡기고 싶은 눈치로 이야기했고, 나는 고민했다. 당장 형편으로는 무엇이든 일을 시켜주고 돈을 준다면 감사해야 하는 게 맞지만, 막상 무엇이든 할 상황에 이르니 그게 무엇이냐를 따지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따지는 게 맞나 또 고민하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게 여자는 친절하게 물었다.
그럼 진호 씨가 직접 고르라고 한다면 공모전을 할래요, 잡지를 할래요?
그제야 나는, 잡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하고 답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여자와 남자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허벅지 아래 손을 넣고, 둘의 눈치를 보며 멋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른 시간에 면접을 끝내고 나는 연남동에 갔다. AK몰 건너편 연남동 거리 초입 반려동물용품 가게에서 방울이 달린 장난감 하나와 습식 간식을 사고 일찍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갔다.
이후 나는 마치 대단한 일을 끝낸 사람처럼 게을리 주말을 보내려고 했다. 실제로 토요일엔 친구와 대낮부터 맥주를 마셨다. 아쉬움에 2차를 가서 소주라도 더 마시고 싶었지만,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는 친구에게 그러자 권할 수 없었다. 나는 고작 맥주 한 잔만 마신 채 무료히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을 탔다. 마음껏 기분 내지 못한 채 집에 돌아가는 것이 아무래도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나 마구 쏘다니자니 영 자신의 꼴이 초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펼쳤다. 멍한 얼굴로 단편 소설 하나를 쓰기 시작했다. 새벽이 다 돼서 나는 소설의 초고를 모두 써내자, 어지러웠던 마음이 그제야 정리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