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챔피언
“우리는 챔피언”은 만화보다 장난감이 더 인기가 많았다. 문방구 건물 밖에는 작은 미니카 레일을 쏜살같이 달리는 미니카를 구경하는 어린 무리가 있었다. 나도 가끔 무리에 섞여 동경하는 얼굴로 미니카 경주를 구경하곤 했다. 나는 쉴 새 없이 달리는 미니카를 어떻게든 눈으로 좇아가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저 미니카를 따라 눈알을 굴리는 것은 퍽 재밌는 놀이였다. 멋진 디자인의 미니카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내가 그 미니카에 올라탄 선수가 되어, 위태로운 레일을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몰입은 얼마 가지 않는다. 득의양양한 얼굴로 제 미니카를 자랑한 한 녀석이 탁 미니카를 집어 가버리면 시답지 않은 어린 놀이는 끝이 나는 거다.
명절에 받은 용돈인지 저금통에 남은 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어린 내겐 지폐가 몇 장 있었던 적이 있다. 어떻게 쓸까 고심하던 끝에 나는 그 돈을 들고 문방구에 갔다. 자질구레한 불량식품부터 시작해 딱지, BB탄 총과 변신 로봇 등 그 시절 가지고 싶은 온갖 물건들이 여기저기 산재(散在)되어 있어, 나는 항상 들어갈 때마다 원래 목적을 까먹고 멍청하게 구멍가게 곳곳을 구경한다. 역시 그렇게 이것저것을 구경하다 미니카 코너에 도달해서야 내가 미니카를 사려고 했음을 깨달았고, 나는 미니카 상자와 모터를 살펴봤다. 만화에서 자주 봤던 주인공의 미니카가 바로 앞에 있었고, 그 옆에는 일본어가 쓰인 언뜻 보석처럼 멋진 모터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잔뜩 들었다 놨다 한동안 구경을 하다 미니카만 세 상자와 혓바닥이 파래지는 사탕 몇 개를 샀다. 투박한 디자인의 빨간 미니카였는데, 만화에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당연히 메이커도 아니었다. 다만 세 개를 사고 싶었기에 그걸 샀다.
신이 나서 집에 돌아온 내게 큰형은 ‘똥 모터’라 핀잔을 주었다. 검은 봉지에 담긴 상자를 들춰보며 만들어봤자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을 거라고 형은 말했다. 작은형은 별말 없이 하나를 챙겼다.
이후 장면이 기억나지만 어쨌든 이후 셋은 거실에 모여 미니카를 조립했다. 작은형은 설명서를 읽으며 조그마한 조립품을 만지작거렸다. 큰형도 옆에서 고심해서 조립했고, 어린 나는 혼자 조립할 능력이 못 되었기에, 형들은 내 것도 얼추 도와줬다. 능숙하게 먼저 완성한 큰형은 미니카에 건전지를 끼우고 앞에 널브러진 상자와 조립품을 치웠다. 나랑 작은형은 만지던 걸 멈추고 큰형의 미니카를 지켜봤다. 큰형은 미니카 시동을 켜고, 빛이 들어오는 베란다로 넓게 펼쳐진 거실 바닥에 미니카를 내려놓았다. 위잉 위잉. 맥없이 돌던 바퀴는 얼마 못 가 멈추고, 미니카 역시 저기 빛을 향해 멀리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췄다.
이거 봐, 똥 모터를 사 와서…….
이후 나와 작은형이 만든 미니카는 어째서인지 작동조차 하지 않았고, 그렇게 세 미니카는 나란히 상자에 들어갔다. 그리고 언젠가 엄마는 우리도 모르게 모두 버렸다. 물론 맥없이 끝나버린 놀이에 실망한 나는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가끔 그 기억이 떠오르면 톡톡 쏘는 장면들이 떠오르며 머릿속이 참 재밌다. 케케묵은 냄새의 문방구는 보물로 가득하고, 합당한 요금을 내고 주제에 맞는 물건을 챙겨 나올 때의 만족감. 달콤한 사탕 맛. 유난히 키가 큰 큰형의 시큰둥한 얼굴. 거실에 모인 삼 형제. 햇살이 잔뜩 들어온 오래전 현대 아파트 거실.
나는 항상 부모님을 따라 나와 밤 열두 시까지 치킨 가게에 혼자 머물렀으니 나로선 형, 누나들과 노는 건 항상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느 여름날에 형들과 누나가 집에서 치킨 가게까지 걸어온 적이 있는데, 경인교대입구역 근처에서 서구청역까지 초등학생 걸음으로 걸었으니 서너 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길도 잘 모르는 어린아이 셋이서 더운 여름 물어물어 길을 찾아 걸었을 그 무용담을 나는 항상 부러워했다.
누나와 작은형은 미술학원을 다녔는데, 나는 그들을 따라서 한동안 그림을 그렸다. 또한 큰형은 항상 스포츠형으로 머리를 잘랐는데, 역시 나는 형을 따라 짧은 머리를 고집했다. 사춘기가 되어 큰형이 일명 “샤기컷”을 하고 머리에 왁스를 바를 땐 나 역시 아버지에게 “샤기컷”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형 누나들과 어울리고 싶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졸졸 따라다니는 꼴을 상상하면 지금 순덕이와 다르지 않다. 내 걸음 소리만 들어도 현관에 나와 울기 시작해선 신발도 쉽게 벗기 힘들 정도로 발 주변을 돌아다닌다.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순덕이는 옆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며 앵앵 운다. 유튜브에서 본 대로 이십 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놔두려고 하지만 결국 아이의 칭얼거림에 못 이겨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안아준다.
우리 네 남매는 이제 순덕이까지 다섯이 되었다. 누난 츄르는 염분이 많아 꼭 한 번 줄 땐 절반씩 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하지만 작은형과 나는 한 번에 모두 줘버린다. 몇 번 절반만 주고 끊어버렸는데,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얼굴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그냥 다 준다. 큰형은 알레르기 때문에 내 집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하지만 기어코 순덕이를 들어 올리고, 쓰다듬어 얼굴이 붉게 부어오르고 코가 막히고 나서야, 안 되겠다, 하고 집을 나간다.
누나와 형들의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 나도 어쩌면 이리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큰형 바쁘지.
응 약속 있는데 왜?
아니, 순덕이가 갖고 싶은 게 있다고 해서.
뭐야. 나는 형에게 2만 원짜리 사료 보관통 사진을 찍어 보냈다.
어이없네, 하고는 형은 2만 5천 원을 보냈다.
잘 키워.
사랑해 형.
나도.
어제 나는 큰형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미니카를 만들던 추억을 떠올렸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