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뭔가요
아 씨발.
순덕이의 울음소리에 이골이 난 나는 결국 욕을 뱉고 집을 나왔다. 하필 나갈 일이 있었던 참이었으나 욕을 내뱉고 나온 꼴은 아무래도 순덕이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밥을 먹으면 울고, 노트북 앞에 앉아도 울고, 씻으려 화장실에 들어가도 운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잠이 들 때까지 녀석은 쫄래쫄래 따라와선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운다.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쉴 새 없이 말이다. 무릎 위에 올려 한참을 만져줘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줘도. 맛있는 간식을 줘도. 그것도 그때뿐 무릎에서 내려온 순간. 놀이가 끝난 순간. 간식을 모조리 해치운 순간. 녀석은 또다시 운다. 결국 소리에 못 이겨 현관문을 열고 도망이라도 가면, 녀석의 울음소리는 두꺼운 현관문을 뚫고 복도에 울린다. 야옹. 야아아옹. 갸아아아아옹.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그 울음소리는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시작된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언뜻 보아 아픈 구석도 하나 없는 아이가 어째서 나만 보면 저리 우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굳이 커피값을 내고, 그 소음으로부터 아이로부터 피신을 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역시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오늘처럼 늦은 시간에 나와 고작 세 시간 정도 앉아있는 것이야 적당히 괜찮다지만, 매일 같이 내 집에서 도망쳐 딱딱한 카페 의자에 앉아 남 눈치나 보는 꼴이라면 내 집이 내 집이 아니게 되고, 바깥은 당연히 바깥이고, 안도 역시 바깥이 되어버리는 형국이니 과연 이대로 가다간 돈은 돈 대로 거덜이 나고, 몸 누일 곳 하나 없는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녀석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카페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10분 후면 도착합니다. 그의 연락을 받고, 나는 카페 밖으로 나와 그를 기다렸다.
내 이야기를 하자면 근래 나는 무척이나 지쳐있었다. 일단 근 한 달간 새벽 2시를 넘겨 일어나기 일쑤였고, 정오가 다 돼서야 더운 열기에 불쾌하게 잠에서 깼다. 무지근한 몸뚱이를 일으켜 그나마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하려 하면, 잔뜩 데워진 아스팔트가 억지로 깨운 일말의 상쾌함마저 모조리 앗아갔다. 집 앞 카페에 앉아 억지로 노트북을 켜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로지 어떠한 구체적인 사건도 말하지 않는 불쾌감만이 가득했다. 이미 마음이 불쾌할 준비가 되었으니, 실상 불쾌하지 않을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순덕이의 울음소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내가 불쾌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나를 이렇게 불쾌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게 원인이었고, 곰곰이 따져보면 역시 모든 건 결과였다. 그러니까 수많은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처럼 보였지만, 다시 생각하면 내가 힘들어서 수많은 것이 그리 힘들게 흘러가는 것이었다.
멀리서 유난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하얀 차 한 대가 나타났다. 설마 싶어 바라보니 얼핏 짙은 창 아래 운전석에 앉은 그가 보였다. 그는 나를 확인하고는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일전에도 그랬지만 나는 먼저 카페에 와있었고, 그는 내게 커피를 사주겠다고 했다. 지난번엔 어색해서 고맙다 말하며 받았지만, 이번엔 솔직하게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업무 이야기보다 나에 대해서 더 많이 물었다.
꿈이 무엇인가요, 진호 씨.
꿈. 스물여덟의 꿈.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왜 글을 쓰나요, 어째서 나와 사나요, 와 같은 물음처럼 그에 대한 대답이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이것 모두 그가 내게 물은 질문들이었다). 내가 궁금해서든, 내가 궁금하지 않아서든, 때에 따라 진정성이 생기기도 하고 때에 따라 일말의 관심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런 질문들에 익숙하게 하던 대답들이 있다. 이를테면, 내 손으로 물고기를 잡기 위해 통발을 만드는 법을 배우는 거다, 하고 답하거나 내 삶을 내 탓으로 만들고 싶어서 나와 산다, 하고 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 문장을 기억할 뿐 내 마음엔 그 문장의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 돌연 그런 질문을 들으면 이제는 그런 물음이나 대답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꿈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방향성. 이렇게 살기로 마음먹고 살고 있는 이상, 이 삶 이외에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없습니다. 저는 아주 아등바등 이 삶을 이 이야기를 살아가면 그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미 꿈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 그렇고 말고요.
저는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삽니다. 나는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 죽나 나중에 죽나 나는 이 길을 걷고 있을 테니까.
오 안돼요. 지금 죽어도 좋다는 말이시죠? 그건……. 그는 마치 지금 죽어도 좋다는 식의 조증 환자처럼, 혹은 자기 확신에 취한 인물처럼 오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정반대였다. 지금 나는 울증 환자에 가까웠고, 내게는 아무런 확신도 없었다. 그의 오해를 고쳐주려 말을 꺼냈다.
아뇨, 저는……. 하지만 나는 이 사태를 원해서 맞이한 것이었고, 그것으로 꿈을 이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우울하고 불확신에 젖은 삶. 그런데 당장 죽어도 좋다. 그 괴이한 고백이 나 역시 영 이상하게 들렸다. 이내 나는 말을 꺼낸 걸 후회하고 입을 꾹 닫았다.
자리에 일어서면서 그는 또 나에 관해서 물었다. 무엇을 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룸펜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이건 장강명의 말이었다).
룸펜이 뭐죠? 그는 물었다.
최하위 계층을 일컫는, 뭐 그런 말입니다.
그는 멀끔하게 차려입은 나를 훑어보면서 의아한 듯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 차림을 훑어보며, 오만 원도 안 되는 옷가지들입니다, 하고 그의 미소에 대답했고, 그것도 나름의 재주네요, 하고 그는 답했다.
그와 헤어지고 나는 집에 돌아왔다. 기다렸단 듯이 순덕이는 문 앞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아이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나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왠지 모르게 순덕이에게 미안했다. 미안해 순덕아. 미안해 순덕아.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