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들
얼마 전 그를 만났다. 그는 역시 청록색 모자를 쓰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더욱 많이 자라 있었다. 나는 그에게 빌렸던 작문 관련 책을 주전부리와 함께 봉투에 담아 돌려주었다.
나는 그가 하는 일을 부러워했다. 유튜브 영상 스크립트를 작성하는 일이었는데, 분야가 우리가 하는 작업과 그리 멀지 않았고 일과 외 시간을 얼마든지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의 월급이지만, 나로선 퍽 부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나 역시 비슷한 일을 구했다. 유튜브 영상 스크립트를 만드는 일이었고, 내가 하는 작업과 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플롯을 연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작업이었다. 일과 이후의 개인 작업 시간도 충분했다. 물론 겨우 입에 풀칠하는 정도의 월급이지만, 나로선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일자리를 구했다는 소식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잘됐네. 엔간히 좋은 일이네 그려.
형식적인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진정성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상황이 주는 느낌이 다른 이의 축하와는 사뭇 달랐다. 아무래도 다른 처지의 사람의 말과 같은 처지의 그의 말이 같을 수는 없었다. 같은 나이에 같은 분야의 것을 연마하면서 비슷한 꿈을 가지고 사는 그의 축하는 언뜻언뜻 축하의 말에도 고독함을 느끼는 내 가슴에 콕 박혔다.
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지 않는다. 글쎄,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멀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단지 생각이 나는 정도로는 여간 멀지 않을 수 없는 거리의 섬에 사는 나는 웬만해선 사람들과 만나지 않는다. 나의 인연은 대부분 섬 밖에 있어 누구를 만나도 족히 한 시간은 넘게 걸리니 어쩌다 연락이 닿아도 대부분 ‘언젠가’로 만남을 미룬다. 시간이든 돈이든 언제나 빠듯한 내게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할 방법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언젠가 한 사람이 있었다. 1년 전 다리만 낫고 나면 곧바로 순덕이를 내놓을 거란 말에, 그 아이 다시 내보내면 어떻게 돼? 하고 그녀는 물었다. 이미 어떤 답을 그려놓은 채 아무것도 모르는 양 묻는 꼴이 퍽 역겨웠다. 나는 그렇다. 이런 문장 하나에, 백지장까지 하얀 얼굴 뒤에 숨겨놓은 의도에, 나는 역겨움을 느낀다. 그 의도가 설령 도덕적 교화 따위와 같은 빛 좋은 구실이라도, 그것을 숨기고 모른 척한다는 사실 자체에, 모른 척하며 모종의 대답을 강요하는 태도 자체에 나는 구역질을 느끼는 것이다.
언젠가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새 퍽 가까워진 나와 순덕이의 모습을 보며, 데려왔으면 그냥 책임지고 키우세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마치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확신에 찬 꼴이 퍽 역겨웠다. 역시 나는 그렇다. 그런 문장 하나에, 선(善)이라는 자아도취로 완악하게 굳은 얼굴에, 나는 역겨움을 느낀다. 마치 자신이 대단히 어른스러운 사람인 양 말하는 자신 있는 멍청함에 나는 토악질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내겐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래? 하고 되묻는 사람. 자기 속으로는 모든 답이 나와 그것으로 나에 대한 평가가 끝난 상태로,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는 사람. 결국에 내가 스스로 내 길이 어리석고 내 삶이 초라하다고 인정하는 대답을 해주길 바라며, 끝 간 데 없이 스스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질문하는 사람. 결국은 스스로 어리석었다고 고백하는 꼴을 보고 싶어 안달 난 사람.
이제 적당히 하고 그만해, 하고 짧게 말하는 사람. 마치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을 만큼 내 길이 못난 길이고 길게 말할 것도 없이 한심한 짓은 그만하라고,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는 사람. 내게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와도 자주 보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 아무렇게나 술집에 들어가 그와 거리낌 없이 마시고 떠드는 일은 내게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 끄덕임에는 거짓이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고, 소주를 마셨고, 또 맥주를 마시고 위스키를 마셨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가 보기엔 우린 이미 많이 와버렸어. 되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왔어. 그러니까 힘내자.
나는 그가 부러웠다. 글을 읽지 않은 오래된 애인이 곁에 있다는 게.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은 시기에 만나 뭐든지 부끄러울 시기도 서로 모른 척 이해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이미 그런 시기는 지났고, 뭐든지 부끄러운 이 시기에 아무것도 모른 척 누군가에게 기대할 순 없었다. 그와 헤어지고 그런 적적함을 느끼며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어제 집에 어머니가 찾아왔다. 달걀과 칫솔, 그리고 빵과 우유를 한 아름 사 들고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저녁을 사주겠다며 찾아온 그녀였다. 함께 저녁을 먹고, 그녀는 순덕이를 구경했다. 이제는 완전히 제집이 되어버린 내 집을 어슬렁어슬렁 거닐던 녀석이 현관 앞에서 벌러덩 눕더니 몸이 이리저리 돌리며 권태로운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엄마는 말했다.
진호는 참 대단하다. 참 대단해.
이런 단칸방에서 저 작은 고양이와 단출하게 사는 꼴을 보며 엄마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뭘 대단해.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렇게 사는 거지.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