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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호 Aug 17. 2021

XLII

경쾌한 미로



    1.

     최근 나는 두 개의 단편 소설을 썼다. 원고지 20매 남짓한 분량이니 기존 공모전의 80매와 비교한다면 현격히 적은 분량의 소설이었다. 내가 정한 분량은 아니고, 대학 후배 하나가, 형 관심 있으면 해 봐, 하고 태그 했던 지역 문학 공모전의 기준이었다. 그 제목처럼 단편 소설이라는 말보다 ‘짧은’ 소설이라는 말이 그 분량에 더 적합한 공모전이었다. 고작 5만 원짜리 상품권을 상금으로 한 작은 공모전이었는데, 나는 그 아기자기한 매력에 끌려 두 달간은 이걸 목표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역하고 주말이 지나고, 막연한 작가 지망생의 하루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는 모종의 막막함을 마주해야만 했다. 말 그대로 지금 내가 어디쯤 머물고 있고, 어디를 향해 걸어야 할지 그려진 지도가 없이 낯선 동네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충 어디쯤인지는 말해주었으나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나도 몰랐으니 그들도 역시, 글쎄, 하고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그때 내가 찾은 곳이 공모전이었다. 저걸 목적지로 삼으면 되겠다 싶어 나는 연말에 있는 큰 신춘문예 공모전 하나와 몇 달 뒤에 있을 작은 수필 공모전을 달력에 표시해두었다. 그리고 당당히 두 공모전에 모두 떨어졌다. 수필 공모전 정도면 정성을 다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발표 당일이 되어도 연락은 안 오고, 한참 뒤에야 집으로 택배가 하나 왔다. 응모자 전원에게 오는 기념 노트와 당선작이 수록된 책이었다. 이런 거에 뒤질 건 뭐람, 하고 성질이 났지만 그뿐이었다. 그 후로 3년간 나는 단 하나의 공모전에도 당선되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앞에 있는 공모전을 달력에 표시해두고, 그에 맞춰 글을 썼다. 아이디어가 좋거나 기술이 좋은 필력은 못되어 주제가 정해진 공모전은 감히 도전할 수 없었고, 자유로운 주제에 분량이 정해진 것에나 겨우 맞춰서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퍽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목적지에도 나는 단 한 번도 도달하지 못했고, 그곳을 향해 걸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게 전부인 작업이었다. 결국에 나는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여전히 모르고, 어딘가 이르렀다는 느낌을 느껴 본 적도 없이 계속해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을 향해 걷다 보면 목적지는 신기루처럼 저 멀리 사라지고. 그럼 아주 잠시 그곳을 바라보다 이번엔 다른 곳을 향해 걷는다. 역시나 다다르기 전에 목적지는 멀리 사라지고 나는 저 먼 곳을 바라본다. 어언 3년 동안 나는 그 짓을 반복하고 있었던 거다.

     대신 나는 고약한 취미가 생겼다. 바로 그 신기루를 좇는 일이다. 마치 그것이 진짜 있는 것처럼 한 번도 다다른 적 없는 신기루를 향해 걷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 나는 체력을 기른다. 매일 한 시간씩 운동한다. 그리고 생업을 구했다. 유튜브 스크립트를 쓰는 일인데 먹고살기 위해, 그러니까 조금 더 오래 신기루를 향해 걷기 위해 일을 하고 있다. 실상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머무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을 향해 망연히 걷고 있다. 심지어 그것을 즐기면서 말이다.          



    2.

     어쩌면 공모전 당선은 물론이거니와, 등단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어쩔 때 단지 생각이 아니라 믿음이 생길 때도 있다. 나는 절대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하리라. 그런 믿음. 발저의 야콥처럼 혹은 막둥이 지몬처럼 나는 0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결국은 팽이처럼 돌고 돌아 시궁창으로 향해 걸어, 더욱더 형편없는 인물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나의 처지로 보거나 평판으로 보건대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즐겁다. 이러한 경쾌한 추락이 나는 좋다. 위태롭고 망연한, 지난(至難)한 걸음이 내가 바라던 삶이고 꿈이었던 것이다. 더욱 힘들고 더욱 위태롭길. 더 많이 실패하고 더 많이 추락하길 나는 바란다. 그때에도 여전히 나는 닿을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진 채로 그곳을 향해 걸을 것이다. 나는 경쾌한 미로에 빠져 살 것이다.



    3.

     단지 앞에 있는 편의점 아주머니는 고양이를 세 마리 키운다. 언젠가 아이와 남편과 함께 산책하던 중 어느 고양이를 만났다고 했다. 자그마한 고양이가 아픈 듯 칭얼거리는 것이 마음이 안 좋았는데, 이것이 자꾸 따라와 두고 갈 수가 없었다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그렇게 집에 들이고 병원만 데려갔다가 다 나으면 분양을 보내든 내보낼 생각이었는데, 정 붙이고 나니 또 사람 마음이 그렇지 못해서 그대로 같이 살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가 외롭진 않을까 싶어 한 마리를 더 데려오고, 또 한 마리를 데려오는 게 결국 팔자에도 없는 자식 셋이 더 늘어서 아주 고생이다. 미간에 주름이 잔뜩 들어간 채 그녀는 말했다.

     마지막에 데려온 놈은 다 큰 랙돌 고양이이었는데 이 녀석이 여간 성질이 고약한 게 아닐 수 없어. 화장실을 다른 친구들 것까지 침범해서 마구 쓰질 않나. 가만히 있는 아이들을 공격하기 일쑤고. 자꾸 넘어지니 털을 조금 깎으려 치면, 이거 봐 이거 봐. 다 물어뜯어 다 물어뜯어. 그녀는 아주 힘든 얼굴로 내게 토로하곤 했다. 그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 그럼 결국 그녀의 불만이 해결되느냐, 아니면 어떤 후회로 나아가느냐. 아니다. 그녀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여전히 그 세 마리 고양이를 모두 키운다. 자신이 어리석은 줄도 알고, 그 생활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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