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생
잠에서 깨도 나의 세상을 그리 선명하지 못하다. 눈이 좋은 사람의 형편은 다를지 모르겠으나, 잠에서 깨 눈을 뜬 내게 펼쳐진 세상은 여전히 뿌옇다. 보이는 것이 그런 데 깬 기분이 들리가 만무하다. 글쎄, 나는 영 흐릿한 것이 꿈에서 깼다기보다는 새로운 꿈이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눈 감은 꿈에서 눈 뜬 꿈으로, 단편 소설에서 장편 소설로, 판타지에서 사실주의로. 그 정도 바뀌었을 뿐이지 결국 이것도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분을 나는 지울 수 없다. 이 삶이 단지 장편 소설에 불과하다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잠들어 꾸는 꿈과 삶에 차이가 있다면 분명 분량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결국 이 삶의 끝자락이 오면. 모든 생의 기억이 과거가 되고 흐릿해지고 결국 나만 기억하는 것이 되는 순간이 오면. 조금 긴 꿈을 꾸다 깨어날 때가 온 것임을 아마 나는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최근 나는 6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마스크만 챙겨 곧장 운동을 나갔다. 1시간 남짓 운동을 하고 돌아와 샤워하고, 젖은 머리로 무료히 단호박 샐러드를 먹는다. 머리를 말리고, 웃옷을 입거나 혹은 벗은 채로 노트북을 켜면 9시가 조금 안 된다. 그리고서야 나는 안경을 썼다. 그러는 동안 순덕이는 군말 없이 나를 지켜보기도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변기 커버 위에 올라와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샐러드를 꺼내면 발 앞에 와 앉아서는 고개를 쳐들고 울어댄다. 무료히 샐러드를 입에 넣고, 포크를 코에 가져다 대면 목을 쭉 빼선 킁킁거린다. 그뿐이다. 노트북을 켜고 자리에 앉으면 흥미를 잃은 아이는 짙은 남색 러그 구석에 털썩 누워 몸을 말고 잠을 잔다. 그것이 9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의 장면이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안 되게 살았고, 얼마 전부터는 사무실을 구해 이젠 회사에 나가야 했다. 그로 인해 지난주부터는 이따금 회사에 나가 사람들과 사무실 정리를 하고 밥을 먹었다.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대표님과 편집자 그리고 작가인 나까지 셋뿐이었고, 모두 또래였기에 우리는 어쩔 땐 친구 같기도 했고, 어쩔 땐 대학교 과제를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제도 나는 그들과 함께 회사 사무실을 정리하고 근처 편집자님 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대낮에 낯선 사내의 원룸 바닥에 앉아 술을 마시는 것은 아무래도 상상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이런 게 모두 꿈이고, 소설이고, 또 내가 어떻게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거라 생각하기에 꿈속을 부유하듯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 이야기가 또 어디론가 나를 데려갈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어쨌든 편집자는 대표와 어느덧 1년 가까이 함께 한 사이였고, 나는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직원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그들의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나를 단박에 알아본 것은 동갑내기 대표님이었다.
내 생각에 그와 나는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 이를테면 사람을 좋아하는 그와 달리 나는 그렇지 않았고, 무용한 꾸밈을 좋아하는 나와 달리 그는 언제나 수더분한 차림이었다. 또 그가 사업가 기질이 다분하고 용감한 인물이라면 나는 정확히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호의적이었고, 나로서도 그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진호 씨 이야기를 해주세요, 그때 다 들려주시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낮술이 조금 들어갔을 즈음 내게 물었다. 첫 만남엔 대뜸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달라고 하질 않나. 그의 질문은 어딘가 막연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런대로 진정성이 어렴풋이 느껴져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그리 물으면 나는 재밌다. 술도 들어갔겠다. 마치 무슨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저는 이게 다 꿈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요. 꿈이라고. 말해보세요. 이게 꿈이 아닐 이유가 있습니까? 예? 그런 말을 마구 해도 될 것 같은 기분.
저는 진호 씨가 엄청 조용하고 내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신 것 같아요.
맞아요. 사실 저는 조용하지도 않고 내향적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인물입니다. 저는 불만이 많고 시끄러운 생을 살았습니다. 온갖 것들이 미웠고, 또 저는 그렇다 소리쳤습니다. 아무렴 저는 아주 짜증 나는 사람이죠. 하고 나는 말을 마구 쏟아내는 상상을 한다.
그런데 정말 사려 깊은 사람인 것 같아요. 사실은 밝은 사람인데 사려가 깊어 보여요.
제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아주 이기적인 놈이에요. 말도 아주 함부로 내뱉고, 남의 사정은 제 알 바가 아닐 때가 많죠. 아뇨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 제가 무슨 놈의 사려는 사렵니까. 예?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상상일 뿐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으레 이런 상상을 화자의 입을 빌려 기록해두니 나 역시 그래 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아, 저는 그냥 혼자고 싶은 것뿐입니다. 음, 예전에 말이죠……
이 무용한 서술이 나의 세계고, 나의 삶이다.
하루를 마치면 하나의 장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어떨 땐 하나의 문장으로도 남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자고 일어나 이런 하루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면 “그 무렵 나는 그랬다……” 하고 한 문장에 담기고 말 것 같은 그런 하루. 호흡을 가다듬고 짧은 단편을 읽으러 가기 전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나의 장편이 어떤 드라마를 그리고 있는지 그려보곤 한다. 마치 정말 내 삶이 한 편의 소설인 것처럼. 나는 나의 삶에 내레이션을 깔아본다. 정진호는 그 시절 한편으로 아주 어리석었고, 한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무언가 포월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역시 지나 봐야 아는 것이고 어쩌면 해석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양심적으로 스스로 어리석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우월하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