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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호 Sep 14. 2021

XLVI

하여간 짜증 나는 것들 천국이다 천국

    1.

     얼마 전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침부터 퇴근 후 운동을 할 요량으로 운동복을 챙겨서 서둘러 출근했다. 6시 무렵 퇴근하고 7시 즈음 계획대로 헬스장 앞에서 내렸다. 딱 한 시간 운동하고 나와 여덟 시 무렵 저녁거리를 챙겨 집에 돌아왔을 때 가지런히 닫힌 문들 너머 어두운 복도에 내 현관문만은 신비롭게도 활짝 열려 있었다. 그건 정말 신비로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익숙하게 보는 불빛인데도 채도가 낮은 복도에서 나를 불러주는 것만 같은 것이, 그것을 본 순간 마치 그동안 내가 그것을 바랐던 것처럼 나는 울컥 감동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안 사는 집에 돌아오면 누군가 문을 활짝 열고 따뜻한 빛으로 나를 반겨주는 장면. 내 안에는 나도 모르게 그런 기대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내가 많이 지친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스토퍼도 설치해두지 않은 문이 무슨 기이한 힘으로 저렇게 활짝 열려, 순덕이. 아차 싶었다.

     다시 본 현관문에는 문과 벽 사이에 우산 손잡이가 끼어 있었고, 뭔진 몰라도 아침에 나가는 길에 대충 세워둔 우산을 건드리며 나가 문이 닫혔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나간 듯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활짝 열려 있었는데. 얼마나 급했으면 정말.          



    2.

     근래 나는 항상 조급했다. 올해 중순부터 나는 그림을 그리는 지인 한 분과 한 장의 그림과 한 문단의 글을 쓰는 작업을 협업하고 있다. 평일마다 반복되는 글쓰기 숙제는 내가 적잖이 긴장감은 주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문화예술 사업을 기획하는 지인 한 분에게 연락을 받았고 격주로 지역의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일종의 ‘뉴스레터’를 만드는 작업을 참여키로 했다. 그런데 지난달부턴 나는 매일 일을 하고 있어 이것들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빠듯한 실정이었다. 하지만 금세 저녁이 쌀쌀해지더니, 한 해 작업을 마무리하는 신춘문예의 계절 향이 코끝을 기웃대 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로 인해 나의 마음은 언제나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한 문단의 글을 쓰는 동안엔 뉴스레터 자료조사가 슬그머니 떠오르고, 일하는 동안엔 번뜩 그림 작가가 그림을 보내왔다. 해 질 무렵 퇴근 버스에선 이제 소설들을 골라 정리하고 부단히 퇴고해야 한다고, 나는 스스로 되뇌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런 와중에 오랜 친구인 Y는 주기적으로 내게 연락했는데 그것이 어지간히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닐 수 없었다. 뭐해ㅋㅋ ㅋㅋ바빠? 저녁 먹을래ㅋㅋ ㅋㅋ어디? 하고 묻는 문자가 오면 나는 인상이 팍 쓰였다. 그건 그 친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괴로워하고 있다는 게 내가 지금 문제가 있단 신호였다. 나 같은 독거 청년을 잊지 않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별안간 울리는 진동 소리에 적막이 깨져버리면 나는 울컥울컥 짜증이 차올랐다. 이런 감정은 나의 오래된 버릇 혹은 습관과도 같았다. 나는 마주한 일이 많아질수록 사람부터 멀리한다. 그건 그렇게 해야겠다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일단 마음에 채우는 것이 많아지면 나는 가장 먼저 정(情)부터 벼랑으로 내몬다. 그것이 가장 쓸모없고 걸리적거리는 거라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리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런 미련 없이 혼자서 문제를 마주하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사서 외로워지고 서둘러 일을 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계속 바쁘네. 다음에 신춘문예까지 투고하면 연말에 보자.

     나는 애써 Y에게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얼마 뒤, 뭐해ㅋㅋ 하고 또 문자가 왔고, S가 영종도에 와서 너 보고 싶다는데ㅋㅋ 하고 이어서 문자가 왔다. 안돼. 오늘은 바빠서. 역시 울컥 짜증이 차올랐고, 한 번 더 연말에 보자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오키ㅋㅋ 하고 답장이 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Y와 같이 있을 S에게 전화가 왔다.

     뭐하냐. 바쁘냐(나는 이 여섯 글자를 듣기도 전에 이미 화가 나 있었다).

     응, 글 쓰느라 좀 바쁘네.

     그래. 아니 영종도도 왔는데 얼굴 좀 볼까 싶었지.

     그래.

     응.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그래. 조심히 놀다 가.

     나는 애써   신경을 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아마 S 내가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내가 '애쓰고' 있다는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정신병 걸렸냐 묻던 S 무례함에 적응한 나와 친한 척하지 말라던 나의 무정함에 적응한 S. 우리 대화는 충분히 조심스러웠고,  마디 말만으로도 서로의 뜻을 이해할  있었다. 그나 나나 그쯤 말하면 적당히 알아듣는 것이다. 친구가 왔으면 얼굴  비춰라,  새끼야. 그냥 조용히 꺼져.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며칠  말귀를  알아들은 Y에게  연락이 왔다.

     추석 연휴 땐 바쁘나?ㅋㅋ



    3.

     순덕아.

     현관문을 쥐고 불러 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가 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문을 열어둬야 할지 얼른 닫아야 할지. 나는 가만히 서서 고민했다. 이 아이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순덕아.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나는 고민하다 문을 닫아버렸다.

     야옹. 그때 순덕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집에 들어가 이름을 한 번 더 부르자 야옹, 하는 소리가 또 들렸다. 그리고는 침대 밑에서 콩콩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순덕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나타났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대. 나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투명한 눈동자를 빤히 봤다. 야, 나가 놀고 오지 그랬어. 응? 침대에 앉아 무릎 위에 올리자 그제야 아이는 안심이 된 듯 숨을 크게 내쉬며 골골거렸다. 녀석은 하여간 짜증 나는 녀석이다.

     우연히 복도에서 느꼈던 신비로운 감동을 떠올리며, 나는 어떤 생각을 했다. 좋다고 골골대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괜히 누군가 내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바빠도 주변도 좀 살펴, 하고. 참나.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순덕이를 세게 쓰다듬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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