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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호 Sep 07. 2021

XLV

매 맞는 현실주의자



    1.

     “… 빛의 전파와 반사라는 저와 회사의 신념에 동의하십니까?……”

     그가 보낸 합격 문자는 무엇보다 섬찟했다. 좋게 말해서 그렇지 문자를 읽은 순간 인상일 팍 쓰인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의 철학에 함께…” 언뜻 다단계 회사처럼 보이는 아니 회사도 아니고 무슨 종교단체 같은 그런 문자가 나로선 여간 기이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대본을 쓰는 일을 하려고 한 건데…….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문자를 적었다.

     “예 대표님 먼저 존중감은 물론 회사의 양식에 맞추어 성실히 일을 배울 생각이 있습니다. 빛의 전파와 반사라는 은유 역시 좋은 말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혹시 업무나 회사가 종교나 신앙과 관련된 건가요? 다른 건 아니고, 말씀하신 빛의 전파와 반사라는 것이 꼭 비유로만 들리지 않고 종교나 신앙과 관련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묻습니다.”

     전송.

     얼마 지나지 않아 밝게 웃는 문자가 한 통 왔고, 어쨌든 나는 그와 일을 하게 되었다.



    2.

     장발의 머리에 큼지막한 체격의 그는 언제나 비슷한 무늬의 운동복 바지에 연두색 군용 슬리퍼를 신고 나타났다. 그런 차림으로 우활(迂闊)한 이야기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나는 어딘가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보기에는 내가 점잖고 현실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어째선지 상대적으로 나는 점잖은 차림을 하고 있었고, 왠지 당장 마주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만든 건 그와 내가 동갑이란 사실도 한몫했다. 만일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거나 혹은 적었다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월을 경험했으니까(혹은 내가 경험했던 세월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하고 대강 넘기고 말았을 텐데 같은 시간을 같은 세대로 살아왔다는 것이 어딘가 그와 나의 차이를 더욱 분명히 느껴지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리 생각했다. 그는 사업가고 나는 글쟁이니까. 그는 세상을 보고 뜻을 품었고, 나는 고작 하얀 화면을 보고 뜻을 품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리 다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생각했다.

그가 나와 편집자를 고작 둘 뿐인 사원들을 앉혀놓고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때면,

     “역시 사업가 기질을 가진 분이셔서 저와 달리 그림이 크시네요.” 하고 나는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그런가요? 하고 웃음 짓곤 했다.

     그렇게 나는 반걸음 물러선 채로 그를 바라보며 낯선 인물이라 생각하며 일했다.

     회사는 몇 주 전 10평 남짓한 사무실을 만들었고, 나는 그를 따라다니며 컴퓨터를 설치하고, 사무용품을 사고 점심을 먹으며 텅 빈 사무실을 채워나갔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컴퓨터가 전부인 사무실에 인터넷이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나는 아예 사무실로 출근해 일하기 시작했다. 여러 회사의 사무실이 잔뜩 쌓여 올려진 건물에는 급식실 같은 한식 뷔페식당이 있어 점심은 그곳에서 먹곤 했다. 나는 대본을 쓰고, 편집자는 영상을 만들면서 그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그렇게 2주가 더 지났다.

      그날도 1시쯤 오전 일과를 마치고 2층 식당에 내려가 셋은 앉아서 밥을 먹었다. 텅 빈 급식실에서 때늦은 점심을 먹는 남학생들처럼 남은 반찬을 가득 담아 허겁지겁 먹는 와중에 편집자인 F는 문득 그에게 “대표님 올해도 3개월 남았는데, 버킷리스트 같은 거 없으세요?” 하고 물었다.

     “벌써 그렇게 됐어요?” 그는 밥을 먹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마치 일 년을 3개월 남기고서 그제야) 잠시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일적으로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그냥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문득 그와 내가 동갑이라는 것이 떠올라선지, 나 역시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새삼 떠올라선지 그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둘 다요. 대표님 뭘 하고 싶으세요?” 나는 얼른 그에게 물었다.

     그는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말했다.

     “저는 조금 더 맞고 싶어요. 뭔가 제가 머리로 꿈꾸던 걸 세상에 내놓으면 세상은 거기서 20을 뺏어가고 또 30을 뺏어가고 그런 식으로 현실적으로 다듬어버리더라고요? 내가 그리던 게 100이면 꼭 내가 얻는 건 10이야. 다 깎아내 버리고. 현실은 그렇게 해버리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현실이고 그게 제가 꿈꾸던 것의 본모습일 거 아닐 거예요. 저는 그게 또 맞다고 봐요. 100이 무조건 그대로 꿈꾼 대로 이뤄지면 좋겠지만, 또 10만 얻으면 아쉽지 꿈꾸던 게 있는데. 저라고 안 그럽니까? 그런데 꿈에 취해서 지레 겁먹는 것보단 전 아파도 맞고 부딪히는 게 좋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꿈꾸는 게 있으니까. 얼른 세상에 꺼내놓고 맞고 싶은 거지.” 매도 빨리 맞는 게 안 낫겠나. 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부산 사투리로 그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사실 그와 내가 전혀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모두 얼른 매 맞고 싶어 안달 난 지독한 현실주의자라고. 사업가든 글쟁이든 스물여덟 살의 우리는 그런 놈들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3.

     사무실로 출근하면서부터 순덕이는 하루 절반을 혼자서 보낸다. 언제부턴가 아이는 내가 집에 돌아오면 곧장 화장실을 가더니 이제는 아예 내가 올 때까지 볼 일을 참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분리불안을 느끼는 고양이를 더러 그런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가만히 있던 녀석이 돌연 구토를 했다. 맑은 침이 전부였지만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게 분명했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해줘야 할까. 나는 매일 밤 그 걱정을 하며 잠든다. 그날은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녀석과 함께 산 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이 말이다.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지나서 이 녀석을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나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아이와의 가족생활을 헤쳐나가는데 정신이 팔려, 1년 전엔 내가 고양이를 키우는 것 자체를 퍽 두려워하고 있었단 사실이 그제야 퍼뜩 머리를 때렸다.

     그래 이제 순덕이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남은 삼 개월 너와 나는 무엇을 더 헤쳐나가야 할까?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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