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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호 Jul 06. 2021

XXXVI

변명은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이 변명이다.



    1.

     이상한 꿈을 꿨다. 아니 꿈이라는 것이 원래 제정신으로 꾸는 것이 아니니, 이상하다는 말은 오히려 꿈이라는 단어의 정직한 수사(修辭)일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말은 꿈이라는 단어 앞에 언제나 반드시 붙어야 하거나, 구태여 붙일 필요가 없이 언제나 생략해도 된다는 말이다. 어쨌든, 나는 중학생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학교의 교문 앞에 서서 학생들이 삼삼오오 등교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무슨 약속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고 나는 막연하게 생각했으나 그게 무슨 약속이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고, 등교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내 교복은 탁한 녹색 줄무늬 교복이었는데, 앞에 등교하는 학생들은 죄다 검은 교복 차림이었다. 잘못 온 걸까. 어쩌면 이들은 고등학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중학생은 등교 시간이 조금 더 이른가, 싶었지만 알 수 없었다. 유난스러운 녹색 교복차림으로 검은 무리에 섞여 교문을 들어갔다. 문 앞을 지키는 선생님이나 함께 들어가는 검은 교복의 학생 중 누구도 나를 개의치 않게 여겼으나 오직 나만이 스스로 잘못된 곳에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한 녀석을 붙잡고 물었다. 꼭 학부모처럼. 여기가 OO중학교가 맞니? 뭐라는 거야, 그건 수서역에 있지. 녀석은 내 교복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이상한 질문이네, 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 학교는 수서역에 있지. 그때 퍼뜩 깨달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이미 등교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나는 후회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럴 만큼 내게 관심을 가지는 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내가 이대로 이 학교에 들어간다고 해도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서역은? 늦더라도 수서역에 가면 되는 건가? 아니 근데 약속이 있었는데. 약속했던 곳이 거기가 맞나? 약속이 뭔데? 누구를 만나기로 했나? 내 마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후회만 가득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교문 밖으로 나간다. 어느새 한적해진 거리에 우뚝 서서 휘몰아치는 무언가를 느낀다. 나는 무엇을 이렇게 후회한다. 이렇게 후회한다. 무엇을?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깼다.

     깨자마자 나는 내가 무엇을 놓쳤고, 또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곧장 아이폰을 확인했다. 10시였다.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세수를 했다. 원래 맞춰두었던 알람이 8시 30분이었으니까. 어림잡아 1시간 30분 늦는다고 보면 1시 40분 즈음에 도착하겠네. 머리로 빠르게 시간을 따져가며 세수를 하고, 양치했고, 맨살에 대충 면도를 했다. 변기 커버 위로 폴짝 올라온 순덕이는 잠이 덜 깬 눈으로 평소와 다르게 일어나자마자 서두르는 내 모습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R의 결혼식이었다. 3년 전 교회에서 우연히 알게 된 그녀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글을 쓴다는 말에 화색이 되어 내게 마구 이것저것 물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나는 식사를 하지 않고 무리에서 빠져나와 교회 주변을 어슬렁거리곤 했는데, 새 신자들을 챙겨주던 R은 나와 함께 남아 따뜻한 차를 건네주며 이야기를 걸어주었다. 전역 후 아예 인천으로 오고 나선 춘천에 있는 그 교회에도 갈 일이 없었고, R도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친절함 덕분이었는지 몰라도 이후에도 나는 가끔 용기를 내 그녀에게 글을 보여주곤 했다. 흥미로운 건 그녀가 언제나 단순한 호평을 넘어서 나의 의도를 적확하게 이해하고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문장이 깔끔하고, 서사가 훌륭한 글이라면 어떤 독자든 쉽게 그럴 수 있겠지만, 신경에 거슬릴 만큼 잦은 오타와 비문으로 만들어진 억지스러운 서사의 초고를 읽고도 아마추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심지어 재밌다고 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물론 작가 본인에게 있어서 그런 목자의 감상은 단순한 흥미로움 이상으로, 형편없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커다란 동력이었다. 또한 늦은 나이에 돌이킬 수 없이 어리석은 길로 가고 있다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위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기쁨을 직접 축하해줄 기회를 놓치려 했다니. 이렇게 후회할 것이 자명한데. 나는 서둘러 바지를 입으며 어리석은 자신을 자책했다.



    2.

     순덕이가 아주 작았던 시절, 녀석을 데려가 키우고 싶단 마음이 생길 때도 있었다. 조그마한 것이 강아지풀을 흔드는 사람 앞에서 폴짝 뛰어오르는 모습이  귀여웠다. 물론 그런 욕심은 실제로 아이를 데려오게  것과는 사실상 무관하다. 그건  번도 키워본  없는 고양이를 키울 만큼  욕심이 못되었고, 나는 기르고 싶지 않은 수가지 이유를 언제든지 열거할  있을 만큼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먼저 털이 날리는 것을 참을 수도 없고, 냄새나는 똥을 매일 치우고 싶지도 않다.  사료며 간식이며 모래며 그런 곳에 돈을 쓰고 싶지도 않다(사실 이것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반쯤 죽어가는 아이를 보고 일어난 불인지심은 모른 척할  없었다. 그러니 조금 수고스럽지만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똥을 치우고, 가격을 따져가며 사료며 간식이며 모래를 사두며 나의 결심을 감당하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없다는 말의 근거들은 모두 단지 감당하면 그만인 것들에 불과해진다. 그런 면에서 변명은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이 변명이다.

     모자와 우산을 챙겨 나와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47분에 영종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용산에 11시 55분에 도착, 그럼 11시 57분 ITX를 탈 수 있다. 그러면 1시 11분에 남춘천역. 1시 30분에 식이 시작하니까 잘하면…… 버스를 탔다. 46분에만 도착해도, 뛰면 탈 수 있다. 뛰면 탈 수 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를 비웃듯 버스 기사님은 유난히 느긋했다. 토요일 오전엔 차도 많았고, 기사님은 끼어드는 모든 차를 너그럽게 보내주었다.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분침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45…… 46…… 47, 아 48…… 결국 버스는 49분이 돼서야 영종역에 도착했다. 그래도 김포공항에서 9호선으로 갈아타고, 노량진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면 11시 57분에 갈 수 있는데…… 게이트가 다르니까 아무래도 무리겠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하다 결국 나는 다음 열차인 12시 30분 ITX를 예매했다. 영종역에서 11시 1분 차를 탔고,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경의 중앙선으로 갈아탔다. 용산역에 도착했을 땐 12시 3분이었다. 물을 한 병 사고, 30분까지 멍하니 기다리다 열차를 탔다.

     남춘천역에 도착하니 1시 45분이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탔다. 웨딩홀에 도착했을 땐 2시가 조금 안 되었을 때였다. 1층에서 하얀 봉투에 축의금을 넣고 사람들을 지나쳐 2층 예식장에 들어서자 입구 앞에 그녀의 가족으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멀뚱멀뚱 나를 바라봤다. 아 R이요,  R 때문에 왔습니다, 하고 말하며 축의금을 건네자 어르신들은 서둘러 내게 명부를 건네며 축의금을 받았다. 나는 그들에게 소금 한 상자를 건네받고 빠져나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뒤늦게 예식장으로 들어섰다.



    3.

     R은 내게 짧은 산문을 한 편 부탁했다. 청첩장에 글 한 편을 넣고 싶은데 그게 네 글이었으면 좋겠어, 하고 R은 말했다. 지인에게 축가나 사회를 부탁한다는 건 들어봤지만 청첩장에 들어갈 글을 부탁하는 건 들어본 적 없었다. 어떤 노래를 부를지 어떤 멘트를 해야 할지. 그런 건 무엇이든 참고할 것이 있을 테지만 이런 류(類)의 작업에는 참고할 게 없어 어떤 게 좋을지나 어떤 걸 조심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건 나의 글을 좋다고 말해주는 R의 진심의 방증이었으니까. 나는 더듬거리듯 그녀에게 물어가며 한 페이지짜리 글을 만들었다. 보여주고 고치고 다시 보여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최종본을 보내주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맙다며 사례금을 보냈다.

     이런 걸 받으려고 한 게 아닌데.

     이런 것도 받아 버릇해야 됩니다, 작가님.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며 되레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예식장에 들어서자 아주 멀리 정신없는 와중에 카메라를 향해 열심히 웃는 R과 그녀를 온몸으로 지켜줄 만큼 커다란 남편이 나란히 선 모습이 보였다. 직원에 말에 따라 그녀는 등을 돌리고, 이내 부케를 던졌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듬직한 남편의 팔짱을 끼고 나란히 섰다. 찰칵 사진을 찍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얼른 아이폰을 꺼냈다. 예식장 한쪽 구석에서 남몰래 둘의 사진을 찍고 있으니 마스크 아래로 웃음이 났다. 역시 직접 와서 보길 정말 잘했다. 정말 잘했어.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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