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백수가 됐지만 정작 노는 것이 아직 다소 불편하다.
그래서 장기간 밑밥을 깔았다. 나는 성실하게 꾸준히 합당한 퇴사 사유를 만들어냈다.
내가 일하면서 얼마나 많은 업무 부담을 느꼈는지, 어떻게 장시간 몰입해서 일자목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 오래 지속된 일자목이 경추성 두통으로 발전한 과정과 이 아픔을 잠재우기 위해 찾아간 한의원에서 몇십 번 봉침과 뱀침을 맞았는지...
이쯤이면 모든 설득이 먹혀들었나 싶었을 때 아버지(통화를 몇 초 안에 완료하는 경상도 남자)는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진지한 모드로 세계 경제 침체와 고용 한파에 대해 30분 넘게 설명해 주셨다.
그래도 내심 기대했었다. 퇴사를 말했을 때 대표님이 연봉 인상이나 승진이란 절대무적의 치트키를 꺼내 들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 '부장' 시켜준다고 했으면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표님은 실속 없이 여러 번 찔러보기만 하셨다. 하마터면 한 달 넘게 이어진 찔러보기에 못 이기는 척 그냥 다시 회사를 다닌다고 할 뻔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는 가오 때문에 글로벌 경기침체의 악재의 정점에서 퇴사를 감행했다.
퇴사 2개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싶다.
모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특출 난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빌 언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오랜 사회생활에 지친 것이 원인이지 않을까?
크게 도전해 본 적 없는, 재미없고 평범한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큰 일탈은 기껏,
이직할 회사를 마련하지 않고 퇴사하는 것이었다.
퇴사하기 며칠 전, 작별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한 임원은 내 용기가 멋지다고, 본인은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곧 새로운 직장으로 이직하신다는 소식이 들렸다.
1. 건강 회복 (바른 자세를 유지하지 않는 이상 평생 따라다닐 것 같지만)
2. 운동과 다이어트 (이건 늘 성공해 본 적이 없다)
3. 웹소설 쓰기 (다분히 상업적인 의도로 고른 목표로 오글거리는 글을 도저히 쓸 수 없다)
4. 앞으로의 인생 방향에 대해 구상하기
5. 마침내 여행, 여행, 여행
퇴사를 한 1월, 아버지의 칠순을 기념하여 가족끼리 규슈에 다녀왔다. 2박 3일이라 짧고 피곤했지만 오랜만의 해외여행이라 좋았다. 온천 여행을 다녀왔더니, 얼마 안 가서 1년에 2번만 온천물 교체를 한 일본 유명 온천이 뉴스에 보도됐다.
그 온천물에 둥둥 떠다닌 것이...#$@%!
최근에는 강릉으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14년을 과업 위주의 삶을 살아왔는데 9 to 6 직장이 사라지니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애초 두리뭉실하게 세운 계획도 실천하기 쉽지 않고, 날씨도 좋으니 놀고 싶었다.
그래서 강릉!
장기간 놀아본 적도 없고 혼자서 하는 여행도 처음이라 시간표를 알알이 채웠다. 이 여행의 목표는 오로지 '나를 심심하게 만들지 않기'였다.
원데이 클래스 마니아처럼 2일을 바다 자석 만들기, 크래프트 반지 만들기에 참여했다.
인스타를 참고하여 여러 포즈로 강릉 네 컷도 찍어보고 초록과 파랑이 예쁘게 그라데이션 된 강문해변에서 그네를 타면서 멍 때리기도 했다.
저 부분에 초록색이 들어있네, 아쉽다.
이 바다를 먼저 보고 자석을 만들었으면 더 예뻤을 텐데...
차 오마카세를 하는 카페에서 1시간 동안 여러 종류의 차를 음미해 보고, 예쁜 한옥 카페의 대청마루에 앉아 순두부 라떼를 홀짝거리기도 했다. 혼자였지만 혼자인 것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무얼 할까? 백수가 된 매일 아침마다 이부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딱히 거창한 계획은 없다.
오늘 계획은 이랬다.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을 탄 후 여력이 된다면 벚꽃이 흐드러졌을 동네 공원을 걸어보는 것!]
모범생처럼 살아서 그런지 백수인 나와 친해지는 것, 노는 것 자체를 양심의 가책 없이 즐기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공차 우롱밀크티 한 모금에도 쉽게 행복을 느끼고 어느 아파트 담벼락에 핀 벚꽃의 아름다움에 아이처럼 감탄할 수 있다.
많이 안 놀아봤으니 더 잘 놀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