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 속 어린 아이를 이해해주는 이
이종 사촌 중에 술 마시거나 감상적이 되면 갑자기 전화하는 오빠가 있다. “OO아, 잘 있나?” 요샌 갱년기 와서 눈물까지 많아진 감성적인 오빠는 평소엔 무뚝뚝하게 있다가 꼭 늦은 밤 전화를 걸기 때문에 내 첫마디는 살짝 시큰둥한 목소리의 “ 오빠, 술 마셨어? “로 시작한다. 그리고 술 담배 끊으라는 잔소리, 언니같은 부인 만난 건 전생에 나라를 세 번은 구했기 때문일테니 부인한테 잘 하라는 얘기로 다소 뻔한 레파토리가 이어진다. 그 끝에는 언니가 바톤 터치해서 둘이 오빠 뒷담화, 아니 옆에 두고 앞담화를 한다.
아니 그러니까 언니,
왜 우리 오빠같은 사람을 만났어요오!!
쫌 다정하고 살가운 사람 만나지.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남편감의 제1 덕목은 다정함이라고 이야기했었다.)
아들바보인 큰이모가 들으셨다면 나를 향해 한소리 하셨겠지^^;; 하지만 지금도 손편지 써주는 큰이모부의 다정함은 어디로 가고, 오빠는 누굴 닮았어?
언니 혹시 얼굴 보고 반했나요?
(지금은 배 나오고 술 좋아하는 볼 빨간 아저씬데, 어릴 때 오빠는 꽤 미남과였다. 친구들이 모두 "야.. 니네 오빠야?? 연예인 누구누구 닮았어. 나 소개해줘. " 할 정도였으니 그래서 반했다면.. 그냥 인정)
"아니요. 저랑 만날 때 이미 얼굴도 커지고 살도 찌고…"
아아..
그럼 대체 언니는 왜 이토록 권위적이고 무뚝뚝하고 술 좋아해, 담배도 좋아해, 명절이면 온갖 친척집 다 끌고 다녀서 ‘언니는 언제 친정가는 걸까.. 도대체 우리 오빠 어디가 좋은 걸까? 정말 안싸우는 걸까?’ 이런 의문을 안겨주는 남자랑 결혼한 걸까. ㅡ 오빠 미안. 근데 이게 진심이었어.
어느날 우리 자매들은 언니가 늘어진 런닝 셔츠 입고 불룩하게 나온 오빠의 배가 너무 귀엽다고 말했을 때, 여자들이 말하는 귀여움은 무슨 애교나 귀여운 얼굴 이런 게 아니라,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남자면 그냥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귀여워보이는 거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셋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진짜 오빠 많이 좋아하나봐. 오빠 복 받았어 정말.
20년 살고 저렇게 남편 배도 귀엽게 봐주는 여자라니ㅡ
야, 근데 “ 너무 귀엽지 않아요? " 하는데, 오빠가 행복한 게 아니라 찐으로 언니가 행복해보였어. 오빤 배가 불렀어. 너무 잘 해주니까 무감각해진 거야. 하지만, 부럽다 언니 그 눈빛.
근데 언니는 쫌 미스테리야.
우리 오빠가 다정, 자상, 이런 거 1도 없잖아. 어디가 좋은 걸까?
그러던 어느 밤 또 술 마신 오빠의 전화를 이어받은 언니_ 언니는 나랑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둘이 좋아하는 것이 비슷^^_ 언니는 오빠가 첫데이트 때 생선 가시 발라줘서 다정한 사람인 줄 알고 넘어갔는데, 결혼하니까 언니가 먼저 안발라주면 아예 생선에 손도 대지 않더라는,, 충격적인 " 오빠 변했어! "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그러게 생선 가시는 왜 발라준 거야?
평생 하지도 못할 거면서. 오빠 이거 사기 결혼이야.
근데 언니는 또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친정 아버지가 너무 무뚝뚝해서 생선 가시 발라주는 건 상상도 못했다고, 그래서 반했는데 결혼하니 아니었다고ㅡ
그렇지만 이렇게 술마시면 전화해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 알지 어쩌구저쩌구 하는, 볼빨간 아저씨를 언니가 왜 좋아하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빠는 정이 많은 사람이지만 표현하는 게 부끄러워 다정함을 숨겨놓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술의 힘의 빌려 진심을 전하는 편인 듯 했다.(그래서 언니가 술 많이 마시는 것도 내버려두는 걸까?) 술 취하면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언니가 하고 싶다는 공부 하게 해주고 싶다는 거니 말이다.
그래, 언니도 너무 오래 집에만 있었어. 저렇게 배우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인데. 이제라도 자기 하고 싶은 공부 하게 오빠가 좀 지원해줘. (집안일도 좀 알아서 하고, 밥도 좀 알아서 먹어.)
그런데 이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아.. 언니만 오빠 엄청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오빠도 만만치 않은 거였어. (아니 알고보면 오빠가 더^^) 이 무뚝뚝한 경상도 아저씨가 대놓고 질투난다고 말을 못하고, 지금도 언니가 혼자 어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책 읽고 모임에서 공부하고 이런 걸 경계하다니 ㅋㅋㅋ 계속 그런 덴 왜 가냐며 시비를 걸고 있었다. (오빠가 볼 빨간 아저씨가 된 것과 달리 언니는 결혼할 당시와 거의 변하지 않았으니 불안할만도 한 건가) 참, 그냥 혼자 내보내기 불안해서 그렇다고, 다른 남자들이랑 만나는 거 싫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지. 그러면서 진심은 공부하게 도와주고 싶대. 하지만 둘의 티격태격을 듣다보면, (서로 내 말이 맞지?, 를 계속 듣다 보면) 언니가 오빠의 이런 어린 애 같은 마음을 알아서 좋아하는가 싶었다.(좋아해서 아는 건지, 알아서 좋아하는 건지 선후관계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낮에 볼 때는 오빠는 말 한마디도 안하고, 오히려 툭툭 말해서 아니 이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했는데, 밤에 전화하면 언니가 저리 좀 가_ 이런 느낌이고 오빠가 엄청 꿀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참 알 수 없는 부부.
막내 동생이 결혼할 때 제부는 그동안 동생을 보살펴줘서 고맙다면서 평생 자신이 보답하고 내게 잘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한테 잘 할 필요는 없는데ㅡ 게다가 난 동생을 보살핀 적도 없는데ㅡ 오히려 받는 쪽이었지.
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엔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애가 있으니, 우리 동생 마음 속에 있는 그 어린 아이를 품어주길 부탁한다고, 답장을 보냈다. 살다가 다투고 서로 안좋을 때 우리 제부가 내 부탁을 떠올려주기를 바라면서ㅡ (지금 보면 제부는 그 부탁을 아주 잘 들어주고 있다.)
<강아지똥>을 쓴 동화 작가 권정생이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잘 알지도 못하는 이오덕 선생에게 이런저런 투정을 부렸다는 일화를 읽고 평생 외로웠을 그에게 그런 사람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린 모두 투정부릴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필요하니까. 내 어린 아이같은 모습을 내비쳐도 되는 사람이 없으면 인생이 얼마나 허전할까.
권정생은 이오덕과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이오덕과 마주 앉은 권정생은 가슴이 따뜻해졌다. 권정생은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마음을 터놓지 않는데 이오덕 앞에서는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할수 있었다. .... 입을 옷도 없고 여비도 없고 게다가 건강 때문에 서울까지 갈수도 없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는 가지 못했다. 권정생은 처음 만난 이오덕 앞에서 투정을 부리듯 이런 이야기들을 다 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낀 행복이었다.
ㅡ 이기영, <작은 사람 권정생>
이 행복감은 권정생 선생만의 것이 아니었을 거다. 그 얘기를 듣고 투정부리는 마음을 받아주는 이오덕 선생도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그가 다행스럽고, 또 안쓰럽고, 자신을 믿어주는 그 마음이 고마와 함께 따뜻해졌을 것이다.
투정 부리는 마음,
내 마음 속 어린 아이를 생각하니 그 밤 부부의 세계가 이해될 법하다. (그치만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오빠가 언젠가 언니한테 “나 지금 투정부리는 거야, 받아줘”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