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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Sep 13. 2022

왜 누구는 운명이 되고 누구는 우연으로 남는 걸까

<500일의 썸머>

처음에 남자 주인공한테 감정이입해서 여자 주인공을 엄청 욕하면서 봤다가, 두번째엔 그녀를 이해하고(남자 주인공은 조토끼ㅡ조셉 고든 레빗ㅡ이라 차마 욕하면서 볼수가 없다.ㅜㅜ), 세번째는 극중 클로이 모레츠처럼 현명한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로 끝났던 영화. <500일의 썸머>


영화가 시작되면 나레이션과 함께 이 영화는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처음엔 이게 뭔 소린가 했으나, 다 보고 나니 아! 싶었다.


영화는 운명 같은 사랑을 믿는 남자와 사랑은 우연일 뿐이라 생각하는 여자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다. 또 시간이 지나 운명을 믿던 남자는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반대로 여자는 운명의 사랑을 믿는 쪽으로 바뀌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이 헤어진 뒤 시작되는, 어쩌면 (몸은 이미 다 컸지만, 사랑에는 서툰) 남자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라고 할수도 있다.



주인공 톰은 운명같은 사랑을 믿고 기다려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그딴 건 없다며 깊고 진지한 관계가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썸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말 그대로 그는 사랑에 ‘빠졌다’. 썸머와 사귀게 된 날로부터 톰의 세상은 모든 것이 반짝거렸다. 모든 사람이 웃고 있었고, 세상은 봄날처럼 환해서 마치 모두가 행복한 뮤지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톰이 가까이 가려 하면 할수록 썸머는 어딘지 모르게 철벽을 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썸머가 톰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나중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썸머가 톰을 진짜 많이 좋아했구나, 싶어 오히려 톰이 답답하고 썸머는 안타까웠다.) 그냥 뭔가 둘을 가로막는 벽이 있는 듯 했다.


맨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나는 두려움이든 불안이든 그 벽의 원인이 썸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 뭐지? 썸머가 너무 이기적이고 변덕스럽다고, 또 저럴 거면 연애는 왜 시작했냐고 욕하면서 봤다. 지나고 생각하니 난 그녀에게 빠져 감정이 요동치는 톰의 모습에서, 첫사랑에 빠졌을 때의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고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상우)가 말했을 때 이영애(은수)를 미워했던 것처럼. 톰 역을 조셉 고든 레빗이 해서가 아니라(^^) 그가 어린 날의 나 같아서,, 그래서 썸머가 더 밉고 원망스러웠나보다. (난 운명의 사랑을 믿지만ㅡ 그런 운명 같은 사랑도 어느날 갑자기 빠져드는 게 아니라 함께 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지고, 또 운명 같던 사람과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나니 썸머도 은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치만 톰과 상우쪽의 인간에 가까운 나는 두 여자가 여전히 쫌 밉다.)


둘은 결국 헤어졌고, 톰은 폐인처럼 살며 세상 둘도 없는 비관주의자가 되었다. 이 세상에 진정한 사랑 따윈 없어! 흥, 너네도 금방 헤어질 걸. 톰의 세상은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썸머가 미웠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좋았고, 그런 자신이 싫었다. 썸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을 때 그는 재회의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썸머가 결혼을 한댄다. 뭐라고?? 나한텐 그런 깊은 관계 부담스러우니 뭐니, 운명 같은 건 없다고 해놓고 결혼을 한다고?? 애인도 싫다더니 유부녀가 된다고??? 내가 톰이었대도 화가 났을 거다. 그런데 결혼 소식을 전하며 썸머가 남편 될 사람과의 첫만남에 대해 말한다. 카페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있던 자신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책에 대해 물었고,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했다고. 어느날 아침 문득 너랑 만날 땐 몰랐던 걸 깨달았다고.

(이 말은 톰 입장에선 진짜 충격이었을 것 같다..ㅜㅜ)

톰의 입장에선 그깟 책이 뭐라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과 썸머의 사랑이 시작된 순간도 그냥 우연히 그날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듣고 있던 음악 때문이었단 걸 기억할까. 왜 썸머가 우연히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던 자신과는 헤어졌으면서, 또 우연히 읽고 있던 책에 대해 물어본 남자와는 평생을 약속하게 된 건지, 어째서 운명의 사랑을 믿게 된 건지 톰은 알았을까.



이 영화는 1인칭 시점에서 톰의 시선과 감정을 따라 두 사람이 함께 했던 500일을 기억한다. 난 썸머를 욕하면서도, 썸머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이야기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궁금했었다.


두번째로 다시 이 영화를 봤을 땐,

썸머가 톰을 많이 좋아했으면서도 왜 그와 헤어졌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에겐 톰과 같은 면뿐 아니라, 썸머 같은 면도 있단 걸. 운명이 있단 걸 믿게 되었다며 결혼할 남자와의 첫만남에 대해 얘기하는 그녀의 눈빛이 담담하면서도 조금은 슬퍼보였다고 느낀 건 나뿐일까. 그리고 톰은 정말로 그녀를 사랑한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는 썸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싫어하고, 왜 깊은 관계를 피하려 하는지 진짜 알았을까. 아니, 알려고 노력했을까. 시작은 똑같이 우연이었는데, 왜 누구는 운명이 되고 누구는 그렇지 못했던 걸까. 한 순간의 우연은 우연일 뿐이지만, 그런 우연이 쌓이고 쌓여 운명이 되는 거라면 거기엔 우연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운명이야, 라며

진짜 그녀의 모습은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닌지.

톰의 사랑이 (물론 순수하고 진심이었겠지만) 환상 같은 건 아니었는지. ㅡ 진짜 썸머는 따로 있는데, 환상 속의 그대를 사랑하는 것 같기도.


썸머가 비틀즈 멤버 중 링고 스타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을 때 톰은 그녀의 취향을 비웃으며 놀려댔다. 누가 링고 스타를 좋아해? ㅋㅋㅋㅋㅋ 장난이었겠지만, 썸머 입장에서는 서운했을 수도 있다. 그녀가 링고 스타를 좋아하는 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니까. 다시 보니 그 장면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난 <은하 해방 전선>과 <두근두근 영춘권>,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등을 만든 윤성호 감독을 국내 영화 감독 중 제일 좋아한다. 근데 누가 나에게 “뭐? 이창동, 봉준호도 아니고 누가 윤성호를 좋아해? ㅋㅋㅋㅋ”라고 하면 발끈! 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발끈이 아니라, 쫌 서운할 것 같다. 취향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윤성호 감독을 좋아하지 않는건 상관 없지만.. 상대가 나라는 인간 자체를 존중한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그거 하나로 헤어지진 않겠지만ㅡ 대신 보여준다, 윤성호 감독의 코미디와 위트가 얼마나 재밌는지 ㅎㅎ 봐봐, 이래도 모르겠어?? 어, 우린 유머 코드가 다르구나. 하지만 본인이 좋아하지 않거나 모른대도 먼저 관심 갖고 물어봐주면 그 노력이 더 고맙고 기특하고 아! 운명이야^^ 라고 생각할지도 ㅋㅋㅋㅋ)


정작 톰 자신이 썸머를 운명이라 느낀 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밴드 음악을 그녀도 좋아한다는 거였으면서. 썸머는 건축에 관심 있는 톰의 그림에 관심과 애정을 보여줬는데. 이런 거 보면 운명 같은 거 안믿었어도 썸머가 톰을 진짜 좋아했구나 싶고, 톰을 왜 떠났는지 알 것 같다. 자신이 읽고 있던 책에 관심을 보여주는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다고 할 때, 톰과 그 남자의 차이가 이런 게 아닐까 했다.



톰의 동생 역으로 나오는 클로이 모레츠가 어린 나이지만, 서투른 오빠에게 사랑의 카운셀러 역을 아주 톡톡히 해준다. 아,, 이런 동생 하나 있었으면ㅡ

 

그 여자가 오빠의 운명의 짝이었단 생각은
그저 착각일 뿐이야.
좋은 것만 기억하는 것도 문제야.
다음에 그 여자를 생각할 땐 나쁜 것도 기억해 봐.


동생은 우연히 취향 몇 개 맞는다고 운명이 될 수 없단 걸.

환상에 빠져 하루에도 수십번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오빠에게 현실을 알려준다. 나도 처음 이 대사 들었을 때 깨달은 바가 엄청 많았었다! 모든 과거는 추억이 되면서 조금씩 미화된다. 좋았던 순간만 남아 마치 그런 운명이 다시 없을 것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나쁜 것도 많았어^^


이제 톰은 새로 만난 어텀과는 다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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