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재미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지난 봄과 여름, 도서관에서 끄적인 노트에는 의외로 생각해볼만한 구절들이 많았다. 그 중 파스칼의 <팡세>에서 이런 글을 옮겨놓았더라.
# 단편 139번
인간의 모든 불행은 홀로
조용히 방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탓에 생겨난다.
# 단편 131번
인간은 완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
열정(격정)이나 분주함(사건) 혹은
산만함(오락)이나 열심히 노력함(열중함)이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떠올랐다.
이 131번을 읽고 무척 충격을 받았던 순간이.
그래서 베껴 적은 거였다.
너무 바빠서 지칠 때, 하는 일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가끔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유의미한 구슬을 꿰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산만하고 분주하기만 한 상태인 건 아닐까. 아, 그럼 최악인데! (난 이런 순간에 번아웃이 온다. 똑같이 바빠도 그 일의 의미를 놓지 않고 있으면 견딜 수 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생각이 들면 확 동력이 떨어진다. )
여기에서 파스칼은 지루함과 불안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못견뎌서 기분전환 겸 오락에 빠져드는 것이 우리 인간이 당하는 최고의 궁색함이자 비참함이라고 썼다. 읽자마자 정말 딱! 맞는 말이라고, 어쩜 인간 심리를 이렇게 잘 알았을까 생각했다. 권태를 못견뎌서 이것저것 해보고 또 이사람 저사람을 만나지만, 그 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텅 비어 있는 느낌. 오히려 그런 것을 하기 전보다 더 빈 것 같을 때가 있지. 모두 그런 순간을 경험해본 적 있을 거다. 그러니 권태가 허무를 감춘 장막이라는 그의 말은 진짜다. 둘은 다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미를 잃어버려서 허무하니까 그 모든 게 지겹고 지루한 거였고, 그런 상태로 내 인생이 끝날까봐, 어딘가 있을(?) 의미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불안한 거였다. 그래서 자꾸만 해결책이 되지도 못할 취미와 오락거리를 찾는 거지.
하지만 그 의미 있고 재미 있는 것은 어딘가에서 그냥 찾을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지루하다고 상대방이나 일 자체만을 탓하거나 갈아치우는 건 근본적인 해법이 아닐 수 있다. 그 일과 사람을 대하는 내가 바뀌지 않으면 결국 금방 똑같아질 테니까.
게임이 그렇게 재밌어?
아니요. 그냥 하는 거에요. 지루하니까.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아이들은 대체 뭘 하는 걸까?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물어보면 다들 별로 재미 없는데 그냥 지루해서 한다며 무표정하다. 차라리 게임이라도 신나게 했다면 덜 씁쓸할 것 같다. 뭘 해도 좋으니까(부도덕한 거 빼고) 그냥 신나게, 푹 빠져 있는 인간을 보고 싶다. 그래서 난 점심시간에 축구하는 학생들을 보는 걸 좋아한다. 아고, 저렇게 좋아하는 것을^^
근데, 니넨 뭐가 그렇게 지루한 거야?
내가 스스로 분주한 상태를 만들어서 그런가, 이 글을 쓰면서 떠올려봐도 ‘아, 지겨워.’ ‘너무 지루해.’라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알아들을 수 없는 엄청 어려운 강의 빼고^^ (아침에 <알릴레오>에 출연한 김상욱 교수님의 <엔드 오브 타임> 강연을 들었다. 와! 너무 재미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렇게 어려운 얘기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다니! ㅡ 난 하나도 안지루한데, 학생들이 지루해하는 건 내 수업의 의미가 충분히 와 닿지 않아서였나보다..
흑.. 결국 내가 쫌 더 분발해야겠다는 자아 비판으로 엔드 오브 타임ㅡ)
근데 생각해보면 어떤 일을 하든 지루하고 하기 싫은 순간, 이른바 ‘고비’라는 것이 오는 것 같다. 특히 오래 해야 하는 것일수록 더. 기초를 닦고 뭘 좀 알아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단계가 오는 거지, 첫판부터 신나~ 이런건 단순하고 일시적인 게 아니면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런 고비의 순간에 오락으로 도피하거나 그 일을 그만둔다면 어떨까. 그 순간만 지나면 흥미진진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만둔대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도 러닝 타임 내내 재밌는 건 아니라는 것, 개그맨도 24시간 내내 웃기진 않는다는 것, 엄청 지루한 몇 십 때론 몇 백 페이지를 견디면 어느 순간부터 손을 놓을 수 없게 흥미진진한 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지난 여름ㅡ 인생 처음으로 롤러 스케이트를 타러 갔을 때, 조카들은 씽씽 달리지 못하고 자꾸 넘어지니까, 몇시간씩 바를 잡은 채 연습용 코스를 어기적거리며 타야 하니까 금방 지루해했다. 그리고는 쌩쌩 달리는 옆라인의 언니오빠들을 부러워하며 탈출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동생은 쌩쌩 코스로 가고 싶어하는 조카에게 말했다.
하기 싫고 지루해도
여길 안 거치면 저긴 못가
저기 있는 형아 누나들도 다 여기서 연습하고 간 거야
우리는 그날 내내 넘어지기만 하고 롤러 스케이트, 라고 하면 떠올리는 재미는 하나도 못느꼈다. 물론 연습용 코스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언니 허리 조심해. 넘어지면 고관절 걱정해야 하는 나이야”라는 말만 몇번을 들었는지==;;
하는 일이 지루한 것도 씁쓸한데 하물며 인간관계에서 누군가와의 만남이 지루하다면, 함께 있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이건 정말 슬프다. ㅜㅜ 연인이나 부부 간에 권태기가 있다고 한다면, 서로에게 궁금한 것도 없고 기대되는 것도 없는 그런 순간이 바로 지루함을 느낄 때겠지.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순간을 잘 넘기고 이전보다 더 깊고 친밀한 관계가 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순간을 견디지 못해 이별하거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둘다 함께 지루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어느 일방이 그런 상태라면 그걸 알아챈 상대는 더 비참하고 슬플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때는 아닌 척하며 무관심으로 상처주기보단, 그냥 솔직히 말하고 지루함을 이겨내는 법을 함께 모색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지루함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고마우니까ㅡ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버트란트 러셀이 어느 책에선가 그랬다. 현대인들은 지루함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는데, 맞는 말이다.
지루한 스토리도 집중하려 애쓰며 견딘 사람만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즐길 수 있듯이, 우리 인생도 지루함이라는 고비를 잘 넘긴 사람만이 깊은 관계에서 오는 진짜 즐거움과 꽉 찬 느낌을 누릴 수 있는 것 같다.
지루함을 견디는 나만의 방법.
작은 변화에 집중해본다.
아,
결국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