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가르릉 소리처럼
퇴근하고 문을 열면 고양이는 나를 향해 자기 머리를 자꾸만 들이민다. 빨리 쓰다듬으라고. 나는 평소엔 외롭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데, 역시 퇴근 후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올 때면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 아, 이것만은 어쩔 수가 없는 건가. 그럴 때마다 내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며 자꾸 머리를 들이미는 이 녀석이 없었다면 내 하루가 꽤 쓸쓸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가르릉 가르릉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로 이 녀석이 지금 편안하구나,
기분이 좋구나, 내 손길을 좋아하는구나, 알아챈다.
그럼 내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진다.
너도 지금이 좋은 거지?
알려줘서 고마워.
그리곤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상대의 마음이 궁금할 때, 대놓고 묻지는 못하지만 나와 함께 있는 게 편안하고 즐거운지 알고 싶을 때, 아니면 지금 슬픈 건 아닌지 오늘 힘든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마음이 쓰일 때, 우리가 이 고양이들 같아서 가르릉 소리로 서로의 마음 상태를 바로 알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애써 기분을 살피지 않아도 좋은지 슬픈지 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래 전에 본 <흔히 있는 기적>이라는 일본 드라마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지하철역에서 자살하려던 한 남자를 막은 두 남녀의 이야기가. 언젠가 스스로도 자살을 생각했던 두 사람이 죽으려는 한 남자를 구해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수많은 장면 속에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건, 남자 주인공 쇼타가 들려주던 켈트족의 옛날 이야기였다. 켈트족이 사는 바닷속이나 땅속 큰 마을에는 외로운 사람도, 괴로운 사람도, 약한 사람도, 비겁한 사람도, 차가운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물론 행복한 사람도. 그럼 우리가 사는 이곳과 똑같지 않느냐고 묻는 여자에게 쇼타가 말한다. 여기서는 외로움이나 괴로움 같은 게 안보이지만, 그 곳에서는 잘 보인다고. 슬픈 사람에겐 슬픔의 색이, 외로우면 외로움의 색이, 행복한 사람에겐 행복의 색이 나타난다고.
- 여기서는 안보여
- 뭐가?
- 외로움 하고 괴로움 같은 게
- 그러네...
- 전부 쉬는날에 놀러온 사람들이니깐...
- 다들 행복할까?
-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인생이 잘 보여
- 어떤식으로?
-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색이,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색이,
슬픈 사람에게는 슬픔의 색이
- 그건 너무하네
- 그래도 그런 마을이라면 나만 슬프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진 않겠지. 어째서 이 마을에서는 슬픔의 색. , 외로움의 색이 보이지 않는걸까? 나만 힘들다고
나만 외롭다고 생각하게 되는걸까.
ㅡ 드라마 <흔히 있는 기적> 중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했다.
우리의 감정이 그대로 다 드러나는 그런 세상은 어떨까ㅡ
여자의 말처럼 너무하다.
사회적 가면에 익숙한 우리들은 당황할 것이다.
때론 솔직함이 상처가 되기도 하니까, 속마음은 안그렇다 해도 배려라는 걸 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 아마 모든 감정이 그대로 다 드러나는 사회는 지옥일 거다.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다 보여서 비참하고 때론 잔인할 수도 있겠다. 그렇담 고양이들처럼 가르릉 소리가 나지 않는 게 다행인지도 몰라. 가르릉 소리가 편안과 행복을 나타낸다면, 머리를 쓰다듬어도 그 소리가 안들릴 땐, 어? 기분이 안좋은가? 걱정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주인공의 마음은 이해가 된다.
우리가 다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위로가 되겠지.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이런 걸 생각하면 SNS를 많이 하는 건 아주 높은 확률로 외로움을 더해줄 것 같다. 다들 행복하고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 보이니까ㅡ)
행복한 사람은 행복의 색이, 외로운 사람에겐 외로움의 색이, 슬픈 사람에겐 슬픔의 색이 드러나는 세상은 첫 상상만큼 따뜻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에선 옅은 색이라도 이런 게 보였으면 좋겠다. 그럼 같이 기뻐해주고, 위로해주고, 응원해줄텐데ㅡ
그래서 나는 살짝 티를 내주는 사람이 좋다.
오늘은 힘든 하루였으니 그냥 안아줘,
난 이런 순간에 기분이 좋아져,
이런 말은 상처가 돼,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