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 <당백호점추향>
한동안 주성치의 영화에 빠져 있었다.
무더운 여름밤에 보면 큭큭큭 웃다가 더위를 잊을 수 있다.
오늘의 영화는 <가유희사>에 버금가는 황당한 코믹 사극 <당백호점추향>이다. 주인공 이름이 당백호인데, 추향이라는 여인을 점찍었다, 는 뜻이라고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그림과 시에 능하여 강남 4대 천재 중 우두머리라 불리우는 당백호(주성치 역)는 젊은 나이지만 모든 것을 가졌다. 그의 그림은 왕과 귀족들이 앞다투어 가지고 싶어하는 것으로 한점에 어마어마한 값에 팔리고, 당대 최고 미녀들, 그것도 8명의 부인이 있으며, 뛰어난 재주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니까.
하지만 그의 실제는 처참하고 외롭다.
하나같이 절세미인인 여덟 명의 부인은 또 하나같이 도박과 음주에 빠져 있다. 그가 그린 그림으로 마작판을 만들고, 그가 아끼는 책을 의자 발판으로 쓰며 그까짓 게 뭐가 중요하냐고, 이게 다 네가 자신들에게 충분히 사랑을 주지 않아서라고 항변한다(이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다른 남자와 맺어졌다면 충분히 사랑받고 살았을 수도 있는 여자들이, 당백호와 맺어지면서 다른 부인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데, 정말로 당백호를 좋아한다면 제정신으로 그렇게 사는 것은 힘들테니까.) 아무튼 그의 한탄처럼 여덟 중에 한 명도 제대로 된 이가, 그의 마음과 예술 세계를 이해해주는 이가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실 누구 하나 마음 붙일 곳 없는 외로운 처지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당백호는 친구들과 거리를 구경하다, 귀족가 화씨 부인의 행차에서 시녀들 중 한 명인 추향(공리 역)에게 반한다. 처음에는 "별로 예쁘지도 않구만" 이었으나, 뒤돌아보는 그녀의 미소 띤 얼굴에 "다시 보니 선녀 같구나!"라며 푹 빠져버린 것이다. 그 이후 당백호는 추향의 마음을 얻기 위해 화안이라는 가짜 이름을 가지고 화씨 집안의 하인이 된다.
추향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천하의 당백호가 말단 하인이 되어도 좋다는 마음이었으나, 추향은 화안에게 좀처럼 관심이 없다. 추향은 미모도, 성품도 훌륭해서 화안뿐 아니라 그녀를 마음에 품은 남자가 너무나도 많다. 어리바리한 화씨부인의 두 아들마저도 어머니의 몸종인 그녀와의 결혼을 꿈꾸니까. 그러나 추향은 그 모든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당백호. 응? 그렇다. 바로 화안의 진짜 모습인 당백호이다. 추향은 당백호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의 그림과 시를 사랑하고, 작품 속에 담긴 그의 기개를 사랑하여, 자신이 당백호를 흠모한다고 믿는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친 화안은 그저 "추향 누님!"하고 따라다니는 철없고 귀찮은 어린 애일뿐이다.
그러나 화씨 집안이 위기에 처했을 때 화안이 이를 구하게 되면서(아.. 당백호는 뛰어난 무공까지, 실로 모든 것을 갖춘 남자였다.), 화안이 당백호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안타깝게도 화씨 집안과 당백호의 집안이 원수 지간이라 화부인의 여러 방해공작이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는 해피엔딩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영화의 뒷 이야기가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영화의 엔딩에서, 결혼식날 입을 맞추려던 추향은 장난스런 얼굴로 가위바위보와 내기를 제안하며 당백호의 여덟 부인을 연상하게 해서 그를 헉;; 하게 만드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당백호의 운명이자, 그러한 여자에게 끌리는 취향인 것인지도 모르겠다.ㅎㅎ)
그러고보면 당백호는 추향의 특정한 면(예쁜 얼굴과 따뜻한 마음씨? 쓰고 보니 그거면 전부인 것 같기도 하고...^^ )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는 날에서야 비로소 그녀의 또 다른 면을 살짝 엿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화부인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방해하려고 집안의 모든 몸종의 얼굴을 베일로 가린채 당백호에게 진짜 추향을 찾아내면 결혼시켜주겠다고 했을 때, 당백호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이 지은 시를 읊었다. 분명 추향이라면 이 시에 반응을 하겠지! 그는 시를 읊을 때 반응을 보인 한 사람을 끌어안았으나, (여느 영화였다면 베일 속 그녀는 추향이었을 거고, 두 사람은 감동의 포옹을 했겠지. 하지만 주성치잖아.) 그녀는 추향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화부에서 가장 못생긴 여인이었다.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는,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씌이고, 상대방을 내가 보고 싶은대로 보니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당백호도 그랬던 것 같다.
그것은 추향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눈앞의 당백호를 못알아보고 화안을 무시했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자신은 어떤 남자를 정말로 사랑하고 흠모한다고 믿는데, 실제 눈앞의 그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눈앞에 있는 사람이 보여주는 여러 면모를 자신이 사랑하는 이와 정반대라고 생각하니까. 시와 그림에 능한 당백호도, 엉뚱하고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화안도 모두 한 사람이 가진 모습이니 사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을 거다. 그러나 보고싶은 것만 보고, 꿈속의 이상형을 그려온 추향도 당백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당백호는 부인들 중 한 사람도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며 사랑을 찾아 떠났고, 추향은 화가와 시인으로서 당백호의 진면목을 알아봐주었다. 하지만, 강남 4대 천재 뒤에 숨겨진 유치하고 바람둥이 기질이 가득한 그의 또 다른 면모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백호에 대한 추향의 마음이 가벼웠다거나, 추향을 향한 당백호의 마음이 그랬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위기의 순간에 당백호를 구하기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남긴채 웃으면서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그때 "사랑해 "라는 말을 하며 수줍게 웃는 공리는 정말로 예뻤다. 너를 사랑하지만 나는 화부인에게 진 빚이 많으니 같이 갈 수 없다는 추향은 영원한 이별의 순간인데도 하나도 슬퍼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꿈꾸던 영원한 사랑을 찾았다는 것, 그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그를 구할 수 있다는 것만이 기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아마도 그후로도 오랫동안 "너, 이런 사람이었어?" 라며 엄청 싸우고 티격태격하겠지만... 그러면서 서로가 지닌 여러 면모를 하나의 전체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날이 오겠지. 추향이 다른 부인들처럼 내기를 좋아하고, 당백호가 여전히 철없이 군다 해도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줘도 좋은 순간이 있었다는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딴 소리지만,
아아아, 공리는 너무나도 예뻤다.
다시 보니 선녀 같다! 는 건 내 마음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공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봐도 심쿵.. 해버렸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