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저메키스, <포레스트 검프>
유튜브를 보다보면 많은 문제의 원인을 '결핍'이나 '자존감 결여'에서 찾는다. 뭐만 하면 자존감이 부족해서란다. 자존감 열풍이 불던 초기, 나는 스스로 자존감이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신경을 많이 쓰고, 누군가의 부정적인 이야기가 집에 와서도 내내 생각이 나고, 뭔가를 할라치면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더 우울해졌다. 나는 근원적으로 '나'라는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시험을 못봐서, 이별을 당해서, 누가 뭐라고 해서.. 그런 문제보다 훨씬 더 슬펐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존감에서 찾는 것에 반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건 나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별수 없었다.) 평생 자존감이 높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단 한번의 의심도 품지 않고, 남들이 뭐라건 신경쓰지 않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실패하거나 잘못하면 자존감이 떨어지고, 사랑을 받거나 성공의 경험이 계속되면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사실 난 자존감의 실체가 잘 와닿지 않았던 거다.)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이 없는 게 좋다고는 하지만, 때때로 그런 감정을 갖는 게 보통의 인간 아닌가? ...
사회에서 자꾸만 이런저런 것은 안좋은 것이라고, 어떤 사람은 피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니 그런 감정이 드는 나를 자꾸만 고쳐야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는데, 오히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자존감에 더 안좋은 거 아닌가? 자신을 끊임없이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것, 이건 성찰과는 달리 부작용이 더 많은 것 같은데…이런 저런 생각들이 이어졌다.
흔히들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완벽주의자라는 말도 언제부터인가 100% 칭찬으로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진지하게 완벽주의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딘지 강박적인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과 달리 실제로는 모두 어딘가 완벽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만 같다. 이런저런 사람은 손절하세요, 라면서.
마치 어떤 부족함도 있으면 안되는 것처럼ㅡ
미디어에 나오는 많은 전문가들은 자존감을 가정과 부모, 성장과정에서의 문제와 연결한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니 뭐라 단정할순 없지만, 인간이 태어나 처음 맺는 것이 부모와의 관계임을 생각하면 영향을 아니받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렇게 가정과 부모 변수에 많은 무게를 두는 것이 가혹하고 지나치게 느껴진다. 흔히 말하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한 이는 어쩔수 없는 것이라고 여길까봐, 또 그 역시 나름으로 노력했을 터이나 좋은 부모의 모델이 되지 못한 우리의 부모를 원망하는 것에서 그칠까봐.
우리 중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안정적인 유대와 사랑을 받지 못한 건 불운이지 그 자신의 탓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영향을 받았다면, 그로부터 벗어나 자신으로 살아가려 고군분투하는 것이 대다수 인간의 삶이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결핍없고 자존감 높은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온실 속 화초처럼 아무런 실패나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에게 잘 끌리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럼 인생은 뭐 그럭저럭 공정한 거 아니냐고?
아니,
요즘은 그보다 한수 위의 위의 단계에 도달한, 거의 성자급의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픔이나 실패를 경험하고 뭔가 결핍이 있었는데, 그걸 극복하고 성숙해진 사람. 그래서 속된 말로 더 이상 징징대거나 하지 않고 타인의 부족함을 너그러이 껴안으며, 내가 힘들 때는 적절히 위로와 조언을 주는 사람. 그리고 아주 가끔씩 작은 힘듦을 내게 기대고 또 금방 그걸 이겨내는! 그냥 정신적으로 너무 너무 강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을(이런 사람은 훌륭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지만.. 가끔은 부족함을 그대로 내보이는 사람이 더 인간적으로 여겨진다.)ㅡ
포레스트와 제니, 댄 중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유년기의 불운으로 계속 방황하는 제니는 절대 만나지 말아야할 여자일까, 모든 것을 극복한 듯 긍정적으로 보이는 포레스트는 어떨까? 전쟁 중에 다리를 잃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팍해진 댄 중위는?
30년만에 재개봉한 <포레스트 검프>_
나는 이 영화를 얼마 전에야 봤다. 1994년, 첫개봉 당시 우리 동네에는 영화관이 없었으니까.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뭔가 떠올려봤다. 그랬더니 제니가 자신과 똑 닮은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포레스트가 아이가 괜찮은지를 묻고, 그렇다는 제니의 답변에 안도하던 모습이었다. 자폐가 있지만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가던 포레스트, 거기다 적절한 운이 따라주어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어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 자폐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해낸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영화는 눈물보다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포레스트가 아들을 만나서 처음으로 물은 것은 아이도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단순하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듯 보였던 포레스트도 그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구나..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만의 고통과 인내를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알겠나,
그러자 웃으며 봤던 이 영화가 애틋해졌다.
포레스트를 힘들게 할수밖에 없었던 제니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 제니를 만났던 스쿨 버스, 모두가 포레스트를 옆에 앉지 못하게 했던 그날, 제니는 포레스트에게 곁을 내주었다. 처음 느껴본 제니의 그 따뜻함을 평생 포레스트는 가슴에 품고 살았겠지. 하지만 그런 제니가 아버지의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 평생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나면 포레스트에게 가는 걸 망설인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엔 남자로서 이성적 매력을 못느껴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엔 자신의 상처를 다 알고 있고 그것을 떠오르게 만드는 포레스트와 함께 하는 게 두려웠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그 집과 술에 취한 아버지를 영원히 잊고 싶었을 테니까ㅡ)
포레스트와 제니, 댄 중위를 보면서
자신의 탓이 아닌 불운에 맞서 평생을 싸우고, 조금씩 나아가는 인간의 위대함을 생각했다. 제니나 댄 중위처럼 방황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다시 포레스트처럼 일어나 달리는 사람들 ㅡ 베트남전에서 다리를 잃은 댄 중위가 하느님을 욕하고 자신을 살린 사람들을 원망하며 괴팍하게 굴었지만, 내가 댄 중위였다면 과연 그 정도에 그쳤을까.. 생각하면 그런 모습도 얼마든지 눈감아주고 싶었다. 설령 그가 영원히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대도, 안타깝지만 그럴수 있었겠다.. 싶으니까.
그러니까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에게 쫌 더 너그럽고 관대해지고 싶어졌다. (나를 포함해서)
산다는 게 내 선택과 의지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탓이 아닌 것으로도 평생을 대면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ㅡ
그러니 플라톤의 말처럼 친절하자,
모든 사람은 내가 모르는 저마다의 전투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