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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가

양귀자, <희망>

by 햇볕 냄새

나성 여관의 막내 아들 진우연,

그는 억척스럽게 여관을 운영하고 집안 살림을 이끌어가는 어머니, 상대적으로 마음이 여리고 유약한 아버지, 정의롭고 멋있는 형, 색감이 뛰어나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여기는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재수학원에는 죽이 잘 맞는 친구들도 있고, 자기만의 방이 있으며, 가끔 만나서 데이트를 하는 보라도 있고, 제멋대로 재수 학원을 그만두고 콘택트 렌즈를 사야한다고 둘러대도 한 소리를 하면서 그 말을 믿고 용돈을 쥐어주는 어머니 덕에 그럭저럭 돈 걱정을 하지도, 남들처럼 대학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팔자인 것 같다.


평화롭던 그의 삶에 나성 여관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다.


냄새나는 목도리와 때에 찌든 옷을 걸친 10호실 노인, 남들이 하는 말을 따라 중얼거리며 이불끝을 물고 다녀 바보 소리를 듣는 노인의 손자 민구. 처음에는 노인의 비루함, 척 보기에도 가련한 딸에게 기대어 사는 그 뻔뻔함을 경멸했고, 바보같은 민구의 모습도 가까이 하기 싫었던 우연이였지만 고향 평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도 안되는 꿈을 이루려다 사기를 당하고, 결국 행려병자가 되어 사망한 노인의 삶을 유일하게 아는 이로 남는다. 어린 시절 꽤 유복했다던 그가 풍금을 친 추억 속의 이야기, 노인이 왜 딸의 목숨값을 사기꾼에게 뺏기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원도의 길에서 사망했는지는 우연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9호실의 사내, 찌르레기 아저씨도 그렇다.

우연이는 그가 '그냥' 좋았다고 했다. 그의 어디가 괜찮은지, 어디가 어떻다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었지만, 그냥 자신의 마음에 역겹지 않고 정다웠다고. 그러한 자신의 '그냥'을 믿었다고. 찌르레기 아저씨는 형과 누나가 모두 떠나버린 집에서 우연이의 헛헛한 마음을 채워준 사람이었다. 소주 한 잔에 시름을 넘기며 "남을 비방하기는 쉬워도 위로하기는 어렵다, 누나를 외톨이로 만들지 마라, 사람을 자꾸 구석으로 몰면 안 된다..." 바쁜 중에도 우연이를 챙기던 찌르레기 아저씨. '그냥' 좋았다는 그 말마따나 찌르레기 아저씨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던 거다. 그러나 그는 가슴 아픈 어린 시절의 상처, 지독한 가난, 그로 인한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도 치유하기 어려운 죄책감과 분노를 품고, 아내를 죽음으로 끌고 간 사람을 죽이겠다는 복수의 일념으로 살고 있었다. 찌르레기 아저씨의 일기장을 훔쳐본 우연이는 그가 살인을 저지르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매일 밤을 지샌다. 겉으로 보면 그냥 평범한 건설 노동자인 찌르레기 아저씨의 40년 인생과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고 슬픈 사랑, 복수의 일념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 그의 복수심을 두려워하면서도 왜 그런 행동을 하려 하는지 이해하고,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 역시 우연이뿐이다.

그리고 누나.

친누나를 이토록 동경하는 동생이 있을까 싶게 우연이는 누나를 좋아한다. 누나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세상에 없고, 누나처럼 색을 기가 막히게 고르는 미적 감각을 가진 이도 없다. 누나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고, 아름다운 누나와 함께 길을 걸으면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 여겨졌다. 그러나 백화점에서 일하던 누나는 매장의 값비싼 옷을 몰래 입고 오던 날부터 조금씩 달라지더니 결국 집을 나가 어떤 남자와 살림을 차렸고, 종국에는 술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술집에서 약에 취한 듯한 누나의 모습에 실망하고 분노했지만, 그래도 누나를 좋아하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 집안에서 누나를 포기하지 않고 가장 열심히 찾아다닌 사람도 우연이었다. 아무리 해도 누나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누나가 가지고 있던 세속적 욕망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남들에겐 혀를 쯧쯧 찰 만한 여자로만 보이는 누나가 가진 다른 면모를 알고 있다. 누나는 정다웠고, 눈물이 많았으며,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마지막으로 형,

운동권 대학생 형은 어머니의 희망이었다가 절망이 되어 내놓다시피 한 자식이다. 그는 고문으로 영혼이 파괴되다시피 한 선배에 대한 부채의식, 불의한 시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전직 고문 기술자를 살해한다. 살인이라니!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저질렀지만, 우연이는 형을 미워할 수가 없다. 아니, 더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다. 형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안위보다 더 큰 이상을 생각하는_ 오히려 우연이는 살인의 경위에 대한 형의 글을 본 뒤, 똑똑한 형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냐고 매달리면서, 또 끔찍히 무서워하면서도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소설이 시작될 때,

우연이는 대학 입시를 제외하면 별다른 고민이 없었다. (그마저도 혼자 대입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뒤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누나와 형, 여관에 찾아온 노인과 찌르레기 아저씨를 만나면서 우연이의 삶 속에 그들의 자리가 만들어진다. 우연이가 대단한 마음을 먹고 착한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뜻으로 남들을 도와주고, 그런 자리를 만든 건 아니다. 그가 좋아하는 말처럼 '그냥', 자신도 모르게 옆방 노인이 신경이 쓰이고, 민구가 귀여워 보이고, 찌르레기 아저씨가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그건 우연이가 말한 사랑인지도 모른다.(언젠가 누나가 형은 왜 그러고 다니는지 궁금해 했을 때, 우연이는 자기도 모르게 형은 아마 사랑을 하고 있는 거라고 답했다. 커다란 사랑을_) 우연이가 어떻게 한때는 경멸하고 쳐다도 보기 싫어하던 이들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깊이 알게 되면,

그 사람의 행동 하나, 겉모습 하나가 아니라 그 행동에 깃들여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같이 얽혀서 오는 것 같다. 하나의 전체로 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찌르레기 아저씨의 말처럼, 전에는 쉽게 비난했을 일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10호실 노인의 비루함에 변함이 없고, 민구의 지저분한 몰골과 바보같은 행동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실향민으로서 그가 가진 아픔과 그리움, 죽은 딸에 대한 미안함을 듣기 전과 후의 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 테니까. 그래서 나에게는 상대를 잘 안다는 것, 그의 지나온 삶과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것처럼 느껴진다.



이 두꺼운 책의 맨 뒤에는 소설가 김훈의 글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꼭 마지막 한장까지,

김훈 작가가 쓴 글까지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아, 그랬었구나‘

김훈은 도덕적 성찰이 아니라 그것까지 뒤따라오게 만드는 정서적 성찰로서 ‘아, 그랬었구나‘가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옳고 그름의 규범을 먼저 따지기보다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감응하게 하는 그런 글이라는 평이 무척 와닿았다.

이게 훨씬 더 원초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덧) 찌르레기 아저씨가 쓴 수기는 정말로 눈물없이 읽기 힘들었다. 왜 이다지도 운명의 신은 가혹한가. 슬프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사실은 너무 너무 아름다워서였다. 아저씨와 그의 아내, 미혜의 사랑은 너무 아름다워서 내 눈앞에 꼭 그들이 있어줬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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