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세페 토르나토레, <시네마 천국>
재작년이었던가,
10년 넘게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와 다시 만났다. 그 친구는 내가 교사가 되는 데 최소 8할의 지분을 가졌다(언젠가 이 브런치의 한 꼭지에도 등장했던 바로 그녀다.). 특별한 사건 없이 친구가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서로 다른 곳에서 일을 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문득 그녀가 떠올라 갑작스레 연락을 했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우연인지 몰라도 내가 연락했던 그 날은 친구의 아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병원으로부터 들은 날이었다고 했다. 자신에게 가장 힘든 날 내게서 연락이 와서 반갑고 위로가 되었다는 말이 뭉클하면서도 미안했다. 우리는 서로 먼저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다시 만나게 된 날 지하철역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놀랐고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아서, 우리 사이에 어떤 거리감이나 어색함 같은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서 또 한번 놀랐다.
나는 친구들과 자주 연락을 하고 만나는 편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단짝 친구, 내 단짝은 누구일까? 고등학교때 매일 같은 반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 시간이면 자습실 자리를 맡아주고, 쉬는 시간이면 내 드라마 감상을 들어주고, 같이 야자를 빼고 영화를 보러 가던 영주, 정혜, 주영이? 그들은 지금 이름만 떠올려도 미소짓게 만들지만 단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영주에게는 더 친한 친구가 있었고, 정혜와 주영이의 사이도 나보다 오래 되고 끈끈했으니까. 단짝이 단 1명의 절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에게 단짝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차차, 고1이 끝나갈 무렵의 짝꿍이었던 미진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미진이 역시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레 소식이 끊어졌다. 대학 시절이라면, 10년만에 만난 이 친구가 그래도 그에 가장 가깝지 않았을까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앞에 '단짝'이라는 말을 붙이기는 어렵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친구를 오래 사귀기 힘든 사람인 것인지, 사람을 챙길 줄 모르는 것인지,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잠이 오지 않는 밤엔 한참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동진씨가 그랬다. 토이 스토리3에서 앤디가 장난감들과 이별하는 장면을 두고, 살다 보면 꼭 어느 한쪽의 잘못이나 배신, 갈등 때문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계가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순간에는 미안한 마음보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더 좋지 않을까 하고. 이동진씨의 그 말은 내 마음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우리가 멀어진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고마운 마음과 기억을 안고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어릴 적 친구들도 그랬다. 아련한 추억 속에서 몽글몽글 떠오르는 그 얼굴을 대부분의 일상에서 나는 잊어버리고 산다. 그러다 무언가를 계기로 그 시절이 떠오르면 그 친구들이 그립고 고맙다. 아마 내가 10년이 훌쩍 지나 친구를 만났을 때도 어제 만난 듯 신나게 수다를 떨고 돌아온 것처럼, 영주, 주영이, 정혜도 그렇게 맞아줄 거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우정'이 궁극의 애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니, 궁극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고 뭔가 증명해야 하는 것 같다면, 우정이야말로 모든 애정의 가장 밑바탕에 깔린 은근한 형태의 사랑이 아닌가 생각한다. 남녀 간의 애정처럼 독점을 원하지도, 부모 자식 간의 애정처럼 맹목적이지도, 어떤 불가피한 의무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서 서로 부담이 없는, 그렇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관계. 멀리 있어도, 자주 만나지 못해도 서로 각자가 원하는 것을 하며 잘 되기를 응원할 수 있는 관계 말이다. 물론 우리 마음 속 한 구석은 무조건적이고 끈끈한 애정을 원하지만 그 애착이라는 것이 극단화되거나 잘못 발현되면 상대를 묶어두고 내가 원하는 바대로(그것이 상대를 위한 것이라 스스로 믿으면서) 살기를 바라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친구와 우정은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기에 더없이 좋은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보며 토토를 떠나보내는 알프레도의 마음을 생각했다. 어린 시절을 내내 함께 했던 고향 마을과 알프레도, 가족을 떠난다는 생각을 토토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막연히 두렵지 않았을까. 그런 토토와의 이별이 싫고 두려웠을 것은 알프레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떠나지 않는다면 토토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고, 꿈을 이루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알프레도가 세상을 떠나고 토토가 돌아왔을 때, 알프레도의 부인은 말했다. 알프레도가 매일 같이 토토 이야기를 했었다고.(그 말은 기쁘면서도 슬펐다.) 그런데도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고향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떠나서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고, 네 명성만을 듣고 싶다고 하며 억지로 토토를 떠나보냈다. 영화를 본 후에 남자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는 이렇게 보내주는 시간, 용기, 인내가 필요한 것 같다고. 부모로서의 목표가 독립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녀를 길러내는 것이라면, 부모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태도가 아닐까. 하지만 부모와 자식이라는 그 관계의 각별함과 애틋함 때문에 보내야 할 때 보내주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을 까봐 그 모든 것을 대신해주면서 오히려 자녀의 성장과 독립을 망치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나 역시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보고 싶은 마음,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참고 견디면서 토토를 보내준 알프레도가 얼마나 토토를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 것 같다고.
가위질해야만 했던 그 모든 키스신을 모아붙인 필름
토토가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알고 응원해준 알베르토는 '친구'라는 말이 참 어울리는 사람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