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어거스트, <행복한 남자>
어느날 밤 제목에 이끌려 본 영화, <행복한 남자>
원제 그대로라면 '행운의 사나이'가 더 적절한 것 같지만, 나는 지금의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행운'은 우연히 얻은 것이지만, '행복'은 오랜 삶의 여정 끝에 마음의 평화와 자유에 도달한 그가 얻어낸 것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행운아라는 찬사를 들었지만 그 행운은 불행을 안겨주기도 했고, 결국 그는 더이상 행운아가 아닌때 비로소 자유로워졌고 행복해졌으니까.
이 영화를 보면서 행운과 행복,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물론 남자 배우가 내 취향의 외모였단 건 안 비밀이닷 ㅎ)
이 영화의 주인공 페르는 똑똑하고 야심찬 인물이다. 그는 목사인 아버지와 금욕적인 가정의 분위기, 가난에서 벗어나려 고군분투하다 때마침 코펜하겐의 유명대학에 합격해 집을 떠나게 되면서 성공의 가도를 달린다. 대도시에서도 가난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재능이 있었고 그 가능성을 알아본 부자들은 페르를 후원한다. 그리고 야코베라는 부잣집 딸과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하게 되면서, 조금만 있으면 그가 원했던 부와 명예를 거머쥘 것이었다. 심지어 야코베는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지성미를 모두 갖춘, 페르의 꿈과 가난한 현실까지 이해하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여자였다. 모두가 그를 ‘행운아 페르’라 불렀고,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 그는 온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우선 그의 마음속엔 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기독교적 신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있다. 겉으로는 그들을 부인하고 절연했다고 하지만, 아버지와 하느님은 그의 밑바닥에 뿌리깊이 박혀 있어 미움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그를 괴롭힌다. 그게 무엇이든 무언가에 대해 강한 저항감을 갖는다는 것은 반대하려는 그것을 늘 의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무척 피곤한 일이고, 결국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드러낸다.
또한 그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그로 인해 성공에 대한 강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야코베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 다르다는 생각, 부자들의 행태에 혐오감을 가지면서도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그는 자존심을 지키려다 일을 종종 그르친다. 그는 오랫동안 꿈꾸던 프로젝트 후원을 눈앞에 두고도 기술 허가를 내리는 공직자에게 사과하기를 거부해 결국 후원을 받지 못하고 만다.
페르는 한편으로는 이기적이고, 컴플렉스가 많은 불안한 남자지만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페르가 안타까웠고, 안타까웠고, 또 안타까웠다.. 개인적 능력은 높으나 가정환경과 사회적 조건은 결핍된 사람이 그 결핍을 채우려 고군분투하는 것이 어찌 안쓰럽지 않으랴. 그러면서도 온전히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맞는 것인지 계속 갈등하고 번민하니까. (페르를 보며 <적과 흑>의 쥘리앵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타고난 재능이라는 행운이 주어진 다른 조건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세속적 욕구를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와 집안 분위기, 자신과 대비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 타고난 지위로 부와 안락함을 누리는 사람들과 그런 세상에 화가 나고 억울하다고, 불공평하다고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여정 배우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란 전혀 공평하지 않은 곳이다. 사회교사인 나는 평등을 가르치지만, 그것은 당위로서 타인의 인간성을 나와 같이 보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뿐 실제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불평등하고 다르다. 꼭 재능이 있는 사람이, 노력을 더 한 사람이 더 많은 몫을 보장받지도, 모두가 똑같이 공평한 대우를 받지도 않는다. 내가 특별히 뭔가를 더 잘못해서 내게 불행이 닥치는 것도 아니다. 필연성이라는 인과관계의 법칙으로만 세상을 보면, 억울한 것 투성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일 것이다. 나쁜 일이 생기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겨?'라고 하며 신을 탓하지만, 남들에게는 생길 수 있는 일이 왜 나에게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인지를 설명하기도 어렵다. 물론 페르는 아직 젊고 이렇게 주어지는 세상사를 아무런 불만이나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나는 페르가 너무 득도한 것처럼 자족하는 인간이 아니라 화도 내고 불안해하면서 욕망을 좇는 인물이라 더 매력적이다.)
페르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기독교에 귀의한 뒤 야코베에게 파혼을 선언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이웃집 목사의 딸과 평범한 가정을 일군다.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주말이면 교회에 나가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페르. 성공에 대한 강한 열망도 부모에게 대한 죄책감도 모두 사라진 것이라 믿은 그는 이제 행복해졌을까?
이상하게도 그는 아내, 아이들과 그리 잘 섞이지 못했다. 아내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특별히 공유할 만한 것이 없었고, 아이들은 (마치 페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부인 역시 자신과 있을 때보다 이웃집의 오랜 남사친과 있을 때 더 편안하고 즐거워보인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마음 속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그는 가족을 떠나 홀로 자신의 일(풍차, 수력 에너지 생산 프로젝트)에 전념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늙고 병에 걸린 페르는 신문에서 야코베의 소식을 발견한다. 그녀는 페르와 헤어진 뒤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았고,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 교육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자신을 만나러 와주겠냐는 페르의 연락에 한달음에 달려온 야코베. 페르는 젊은 날 일방적인 파혼으로 그녀에게 상처준 일을 사과한다. 그러나 야코베는 그때 페르를 만났던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으며, 페르를 통해 알게 된 기쁨과 슬픔 덕에 삶의 의미를 찾고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답한다. 그녀가 학교를 세운 것은 페르를 만난 덕분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는 어린 시절의 가난과 그로 인한 컴플렉스가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페르를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는 페르를 사랑한만큼 다른 사람들이 그런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세운 학교, 그곳에 다니는 학생들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이뤄낸 거라 말하던 그녀는 참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도 그녀는 페르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찾아 하는 사람이었으니, 페르 때문에 아팠지만 그래도 그를 만나 행복했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야코베의 말에 페르도 느끼는 바가 컸을 것이다. 세상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을_
늘 신을 찾았지만 그럴수록 자신만 발견했고,
그래서 평생 고독했다는 페르
바깥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고 끝없는 싸움을 해온 그는 삶의 마지막 여정에 이르러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 이후의 삶은 나오지 않지만,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페르의 뒷모습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가 속한 세계와 하나가 된 듯 보였다.
그게 맞다면 그는 이제 자유롭고 행복에 이르렀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