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프랑켄슈타인>
인간을 가장 슬프게, 또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넷플릭스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외로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것이라며,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낼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외로움을 잘 느끼는 사람은 연애나 결혼 상대로 걸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연애나 결혼이 외로움을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너의 외로움은 네 몫이리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어떤 면에서 맞는 말이다. 다소 극단적인 표현을 한 사람들도 어떤 맥락에서 저런 말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고독'과 '고립' '단절'에서 비롯된 외로움은 다르다. 혼자 있음으로 해서 성숙해질 수 있는 인간도 완전한 고립과 단절을 견디기는 힘들 것이다. 고독을 선택할 수 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이렇게 '외로움'을 개인의 몫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진짜 외로워도 “ 나 외로워 ”라고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런 말이 잦아지면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맞지만, 모든 이런 말에 대해 타인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로 응수하는 것 또한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은 스스로 컨트롤 해야 성숙한 인간이라는 믿음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왜 외로움을 느끼는지, 그것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얼마나 파괴하는지는 잠시 잊은 듯도 하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속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피조물은 외로움에 몸부림친다. 이는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살고 있어서 느끼는 외로움과는 또 다르다. 그는 흉측한 외모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오려는 사람이 없다. 그가 실제로도 이기적이고 나쁜 성품을 지녔다면 그에 대한 분노가 덜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따뜻하고 선한 마음을 지녔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동물들과도 열매를 나눠먹었다. 그러나 그의 외모를 마주하면 모두가 괴물이라고 도망치며 그를 미워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을 창조해낸 프랑켄슈타인 박사마저 그를 외면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면 어떨까?
그때도 인간성과 도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피조물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자신과 같은 존재를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여자 버전의 자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모두가 자신을 끔찍히 여기므로 자신은 너무나도 외롭고 불행하다고, 나와 같은 외모를 가진 여자는 같은 처지이므로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 한 사람의 애정으로 전 인류와 화해할 수 있다는 말에서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그를 제외한 전 인류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악을 행하지 않고 나머지 인간을 사랑하며 살 수 있다니,
단 한 사람의 애정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것은 꼭 남녀간의 애정이 아니어도,
부모 자식 간의 애정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영화 속에서 피조물은 눈 먼 노인의 "친구", "너는 착한 사람이다"라는 말에, 엘리자베스의 따스한 눈빛과 손길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가. 다만 누군가 한 사람은 꼭 필요했던 것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진심으로 애정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근원적인 외로움, 존재의 부정으로 인한 불행을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사는 그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것 같다.
학교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단 한 사람만 믿어줘도 아이가 변한다고,
엇나가지 않는다고.
프랑켄슈타인이 여자 피조물을 만들어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었을까?
피조물이 그토록 원했던
그 한 사람은 누구여야 하는 것일까?